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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Feb 26. 2021

14. 겸손한 사랑, 안개꽃

배경 같은 사람

큰아이가 돌 즈음부터 방글라데시에 살기 시작했다. 집에서 조촐하게 돌잔치를 치르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낯선 곳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했기에 물갈이를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아니면 많이 지쳐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 설사를 하고,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를 하니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오라고 했다. 그가 사 온 테스트기는 얇은 종이로 된 테스트기였다. 설명서를 열심히 들여다본 후, 소변을 묻히고 5분을 기다렸다. 선명한 줄이 그어졌다. 둘째를 가진 것이었다.



기쁨도 잠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도시는 한국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었고, 병원도 매우 열악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심한 입덧과 자궁근종 통증으로 병원 입원까지 했었는데, 과연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임신을 확인 한 순간부터 입덧은 심해졌다. 이제 겨우 돌이 지난 아이를 뽀로로에게 맡기고 나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온 남편 손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화려한 꽃이 아닌, 뭔가 어색한 꽃들이 한 대 묶여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래도 익숙한 안개꽃이 함께 있어서 꽤 기분은 좋았다.



 

안개꽃은 겸손하다. 다른 꽃들과 함께 있어도 뽐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꽃들이 더욱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준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배경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남들은 모두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하고, 바디 프로필을 찍기 위해 복근을 만들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고, 필요한 것은 고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나는 아침에도 겨우 일어나고, 미라클 모닝은 포기했다. 뱃살은 축 쳐졌고, 숨쉬기 운동만 한다.

밥 하기 싫을 땐 라면으로 대충 때우고, 필요한 게 있어도 백번 고민하고도 사지 못한다.


남들도 모두 나와 같을 거라 위안하지만, 왜 그렇게 나 자신이 초라하게만 보이는지.  

카메라 속 저 뒷배경, 그중에서도 뭉그러져 형태를 알 수 없는 시야 밖의 배경 같았다.



하지만 그 배경도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데로 따라 하다간, 내 다리만 찢어질 뿐. 나는 내 속도와 방향으로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히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하니 그제야 안개꽃의 겸손함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장소, 어느 꽃과도 어울리지만, 안개꽃만 묶어 둔 꽃다발도 꽤 멋스러운 꽃.



나도 이 안개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편이 준 꽃다발이 시들어 갈 때 즈음 안개꽃만 따다가 작은 화분에 뿌려주었다. 설마 싹이 날까? 반신반의하다 곧 잊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기 시작했다. 물을 잘 주지 않았는데도 싹은 쑥쑥 자라났고 새로운 하얀 꽃을 피우기까지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에 부단히 놀랐다.







나는 인도에 살지만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쓰고, 그 글을 출간해주는 곳이 없어서 직접 책을 만든다.

책만들기 강의를 하고  전자책 만드는 방법으로 세미나를 한다.

이런 저런 sns를 하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연결시키고, 심지어  최근에는 온라인 글방까지 만들었다.


얼마전 남편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계속 벌이는 날 보며 한마디 했다.

“대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배경도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따라가는 걸 내려놓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일을 꾸준히 5년만 해보자 생각했다.


이제 내년이면 꾸준히 글을 쓴지 5년째인데, 특별한 결과물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안개꽃처럼 기대하지 않았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보여지려나보다.


큰 결과물은 없지만 과정 중에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날 보며 힘을얻는다 말한다.

글을 쓰게 되었다 말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배경이 되어 준 안개꽃의 소임을 다했다.





심하게 입덧을 하며 겨우겨우 버텼던 그때.

겸손한 안개꽃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다행히도 임신 기간 내내 아프지 않았고, 4킬로가 넘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지금은 말 안 듣는 아홉 살 아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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