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Mar 08. 2021

7. 일곱, 위로

마흔, 둘의 단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위로를 하는 사람과 위로를 받는 사람.

하지만 위치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어떤 때는 위로를 하는 사람이었다가, 어느새 위로를 받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한번 받은 위로가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아서 시시때때로 위로 충전을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위로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비운의 80년 생들은 딱히 위로를 받지 못하고 살았다. 더욱이 80년 5월, 전라남도에서 태어났으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나마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아무 탈 없이 태어났지만,  광주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생과사를 뚫고 기적적으로 세상의 빛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나보다 이틀 이르게 태어난 친구 한 명은,  엄마가 진통을 겪고 병원에 가는 길에 죽을 뻔했다고 했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험난한 시간을 마주한 우리는 그저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야 했고, 위로 올라가야 성공한 삶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런 삶이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중년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부모로부터 배운 건, 억울하게 살지 않으려면 높은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위치가 어디까지인지는 배우지 못했다.



진실된 위로를 받아본 적 없는 우리 세대들은 대부분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들로 산다. 그래서 마흔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은지도 모르겠다.

마흔과 관련된 책을 보면 대부분 ‘네 자신을 버리지 말고 지키며 살아라. 작은 것들에 행복해라. 그러게 치열하게 살아 봤자 남는 건 질병뿐이다.’라는 위로가 가득 담겨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문장들인데 삶에서 받아보지 못한 위로를 책에서 받으니 뼛속 깊이 공감하고 만다.


반면 우리 아랫 세대들은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파악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들은 위로를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위로와 관련된 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유튜브엔 삶을 위로해 주는 노래와 영상, 풀벌레 소리, 산속에서 오두막 짓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올라와있다. 누가 그런 걸 볼까 싶지만 구독자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중 한 사람이 내 남편이다.


책만 보더라도 이삼십 대를 타깃으로 나온 솔직 발랄한 책들이 많고, 베스트셀러 자리를 장악한다.

얼마 전에 몇 년 동안 베스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책을 읽었다. 해외로 번역되어 출간되기까지 했기에 그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너무 기대를 했던 것일까? 몇 장 읽고는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20대의 저자는 그 나이에 맞는 생각과 태도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는데, 사십 대의 나는 자꾸만 꼰대 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장에 대한 근거는 빈약해 보였고,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혼자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배려는 없는 걸까?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래도 조금은 할 말, 못 할 말은 구별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급기야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 책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내용 이내. 숨기지 않고 솔직하고,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거. 요즘 사람들은 그런 책에 대리만족을 느끼니까.”


아, 그 책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구나.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진실된 위로는 도대체 뭘까?



9살이 된 딸아이의 감정 변화가 부쩍 심해졌다. 호호호 웃으며 놀다가도 갑자기 짜증을 내고, 혼을 조금만 내도 방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간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오빠와 다투다가도 큰 소리로 울고 만다. 도대체 요즘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왜 그런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 한다. 아직 십 대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춘기가 시작된 것일까? 진짜 사춘기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아이가 짜증을 내고 속상해할 때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고 싶지만, 이게 또 쉽지가 않다. 위로하고 달래주는 일도 한두 번이지, 매일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만다. “그만 좀 해~ 그만 좀 울어~ 짜증 좀 그만 내~” 위로는커녕, 화만 더 부추기는 꼴이다. 유튜브나 책에서 배운 위로하는 법이 떠오르긴 하지만 위로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윽박부터 지른다.


말과 행동, 거기에 생각까지 일치하는 삶은 얼마나 간편할까?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하고, 내가 한 말을 행동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국회의원이 되고도 남았겠다.

하긴, 말과 행동이 가장 일치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만 모인 곳이 국회라는 곳이지.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 된다는 걸 알고, 말하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 역시 언행사 불일치의 삶을 산다. 나도 국회로 가야 할까?



어쩌다 한번,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어쩌다 한 번이라 다행이다 싶다가도, 매번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반복해서 하는 것이 지겹다. 특히 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그 넓이와 깊이는 넓고 깊어진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있다. 여러 글쓰기 책에 나와 있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바로바로 나오기도 한다. 나만을 위한 글이 아닌 독자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매번 독자가 아닌 나를 위해 글을 쓴다.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서 삐그덕 거린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 과연 좋은 글일까?

오랫동안 고민하며 써 내려간 글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외면해 버리면 고민했던 시간과 문장이 무색해져 버린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가도 내 아이조차 위로하지 못하는 엄마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멈칫한다.



사실, 위로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환경,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의 인생을 읽으면 그게 가장 큰 위로가 되버린다. 그러고보면 딱히 말이나 행동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위로가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여전히, 나를 위로하며 일기 같은 에세이를 쓴다.  

나를 위로하는 글이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가의 이전글 14. 겸손한 사랑, 안개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