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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21. 2022

5. 나를 둘러싼 소리들 vs 숲의 소리들

나만의 월든을 찾아서

첫 번째 여름에는 책을 읽지 못했다. 콩밭을 가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 꽃처럼 활짝 핀 어느 순간의 아름다움을,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일을 하느라 희생할 수 없는 때들이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이 있기를 원한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161P / 이레, 강승영 옮김]



밀라노에서 첫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조금은 분주한 나날들이다.  새벽 5시에 부스스 일어나 '전신 타바타'유튜브를 켠다. 나보다 두 살 더 많지만 나보다 훨씬 더 날씬하고, 훨씬 더 예쁜 유튜버를 따라 팔다리를 쭉쭉 늘린다. 기여코 이 똥배를 없애리라 다짐한다. 군살 하나 없는 그녀를 보며 이미 내 뱃살도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약간의 땀을 흘리며 거칠어진 내 숨소리를 가만히 느껴본다. 고요한 새벽에 들리는 내 숨소리가 나를 응원하는 기분이다. 왠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로서의 일과 아내로서의 일을 한다. 그 일 사이사이 작가로서의 일과 글 코치로서의 일을 한다. 나의 글을 쓰고, 남의 글을 읽는다. 나의 글을 고치고, 남의 글을 수정한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개인 매거진을 만들어 발행한다. 쓸 말이 있을 때도, 쓸 말이 없을 때도 글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좀 더 많은 모험을 하고, 좀 더 다양한 선택을 한다.


글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보니, 쉬는 시간조차도 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눈을 뜨고, 뭔가 새로운 글감은 없나.... 두리번거리고,

들개처럼 귀를 세우고, 특별한 소리는 없나.... 확인한다. (물론, 이탈리아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아무리 들으려 애써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

모든 감각에 잔뜩 날을 새우며 지내다 보니 마음이 언제나 초조하다. 글을 한 문장도 쓰지 못한 날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sns에 글을 올리지 못한 날엔 내가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스스로 글감옥에 나를 넣어두고 채찍질을 하는 느낌. 간혹 받아먹는 공감의 당근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즐김과 스트레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 탈기를 하다가 "딩~ 동~ 댕~ 동~ 딩~동~ 댕~ 동"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나는 모든 걸 가만히 내려놓는다. 그 소리는 하루에 두 번 울리는데, 점심시간인 12시 30분과 퇴근시간인 오후 5시 30분에 울린다. 점심시간도 퇴근시간도 나에겐 필요 없지만, 그 종소리는 마치,


"자, 이제 멈출 시간이야. 모든 육체적, 정신적 일을 멈추고
일상에 여백을 남길 시간이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두 눈을 감고 시끄러운 내 안의 소리를 끈다. 그러면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 자전거 소리, 쓰레기차가 쓰레기 치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1층 아저씨의 말소리. 엄마와 아들이 대화하며 지나가는 소리....

특별할 것 없는 소리에 낯선 나라의 소리가 한대 섞여 들려오면,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현실일까? 이곳에선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우유 휘젓는 소리도, 물레 도는 소리도, 솥이 끓는 소리도, 찻주전자가 끓는 소리도, 또 아이들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재래적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그전에 권태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렸을 것이다..... (중략)..... 지붕 위와 마루 밑에는 다람쥐들이 있었고, 용마루 위에는 쏙독새, 창밖에는 푸른 어치가 울었다. 집 밑에는 산토끼나 우드척이 있었고, 집 뒤에는 부엉이나 올빼미, 호수 위에는 기러기 떼와 되강 오리가 있었으며, 밤에만 짖는 여우도 있었다.....(중략).... 내 집 마당에는 큰 소리로 우는 수탉도 꼬꼬댁거리는 암탉도 없었다. 아니, 마당 자체가 없었다. 단지 어떤 것에도 악하지 않는 "자연"이 바로 문턱에까지 와 있을 뿐이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1183~184P / 이레, 강승영 옮김]



월든에서 지낸 소로에게는 자연의 소리만이 있었다.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연의 소리는 소로의 삶에 넓은 여백을 드리워준다. 콩밭을 만드느라 분주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멱을 감은 후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앉아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긴다. 그러다 해가 서쪽 창문을 비추면 그제야 시간이 흘렀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날에는 '밤 사이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라고 한다. 그가 원했던 여백이 넓게 드리운 모양이다.


나는 재래적(이전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들) 관념뿐만 아니라  왜래적(밖에서, 또는 다른 나라에서 온 것들) 관념도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라서 그 권태감을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나 자체가 외래적인 사람이다. 동양의 사람이 서양의 나라에서 동양의 음식을 해 먹고, 동양의 말을 쓰고, 동양적 가치관으로 살고 있으니.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더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는 것일까? 글쓰기로 마음의 여백을, 책 쓰기로 삶의 여백을 만들고 싶은 나는 소로처럼 인생에 넓은 여백을 드리우며 살 수 있을까?



잠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한껏 게으름을 늘여놓았다. "인간은 행동의 동기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하루는 매우 평온한 것이며 인간의 게으름을 꾸짖지 않는다."는 소로의 말을 무기 삼아 조금 더 게을러지기로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다리를 타다가 "엄마~ 배고파~"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면 나는 마음의 소리를 가만히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한다. 소로의 오두막에는 자연이 바로 문턱에까지 와 있지만, 내가 머무는 곳에는 내 손이 필요한 가족들의 요구가 턱밑까지 와 있으므로, 햇살 아래 보송보송하게 마른 솜이불처럼  한껏 게을러진 마음을 고이 접는다.


내일 다시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나는 그 게으름을 다시 꺼내 햇살 아래 펼쳐두고, 여백의 베개를 베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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