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머물고 있던 숙소의 기간을 연장하지 못했다. 6월 첫 주에 열리는 가구 박람회 때문에 밀라노 시내 전 숙소가 예약이 찾으며, 금액도 두, 세배가 되었다. 그걸 미리 알지 못했던 우리는 부랴부랴 새로운 숙소를 구해야 했다. 계약한 집에는 6월 중순에나 들어갈 수 있는데, 3주 정도 머물 곳이 사라져 버렸다.
숙소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학교에서 가깝고 저렴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있긴 했지만, 박람회가 있는 주에는 아예 예약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숙소 세 개를 예약했고, 일주일 간격으로 세 번 이사를 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 우여곡절 끝에 구한 첫 번째 숙소로 이사를 했다.
한국에서 밀라노로 올 때 가져왔던 짐 가방이 모두 5개. 그런데 한 달 만에 살림살이가 점점 늘어나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당장 필요치 않은 것들을 따로 모아서 회사 창고로 보냈다. 그렇게 정리했는데도 여전히 짐은 많았다. 어째서 먹고사는 일은 이다지도 과도한 물건들을 남기는 것일까?
다행히도 첫 번째 숙소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딱 일주일만 지낼 수 있다. 그 일주일을 잘 보내기 위해 열심히 짐을 쌌다.
숙소는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방 하나, 거실 하나였지만, 소파 겸 침대가 있어서 아이들과 넉넉하게 잘 수 있었다. 현관문 바로 앞엔 마당도 있어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기 좋았다. 테이블엔 웰컴 선물로 캡슐 커피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커피를 한잔 내려 마당으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담벼락을 따라 드리워진 초록의 등나무가 더욱 상쾌하게 만들었다. 아~~ 너무 좋다.
그때 사방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가 사방에서 내 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모기약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팔꿈치가 가렵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 적군에게 피를 보이고 말았다. 낭패다.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겠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구글 맵을 켜고 새로운 숙소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가는 길엔 꽤 큰 로터리가 있다. 이탈리아 화가인 Lorenzo Lotto의 이름을 딴 곳으로, 로터리 중앙엔 잔디밭이 있고, 그 주위로 버스 정류장이 복잡하게 늘어서 있다.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그 길에서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길치, 방향치인 나는 미리미리 걸어야 하는 길을 가늠하여 아침나절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여행 같은 삶이지만,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니, 꼭 그렇지도 않다. 여행 같은 일상, 일상 같은 여행. 나는 어떠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걸까?
'뿌리 없이 부유하는 삶'이라고 나를 정의 내리곤 한다. 뿌리라 함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 부모님이 일구어낸 땅에 단단하게 내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뿌리가 없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언컨대 정서적으로는 꽤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밀라노에서의 삶을 가족들에게 모두 말할 수 없다. 즐거운 근황을 주로 전하지만, 대부분 침묵을 지킨다. 가끔은 일부러 숨기기도 한다. 해외 생활의 고난을 전하는 순간, 가족들이 염려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처럼은 못 살겠다.", "나는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너무 고생이 많다."라는 염려 가득한 말이 나를 짓누른다. 나의 선택과 방향이 과연 맞는 걸까? 고민이 시작되면, 잠잠하던 우울이 일어나기도 한다.
희한하게도 이렇게 침묵을 지킬 때 언니 중 한 명이 카톡을 보낸다. 숨겨놓은 내 근황을 모르는 언니가 전하는 진심이 나를 깨운다.
"오늘 새벽에 널 위해 기도했어. 언니가 기도하고 있어."
"언니, 고마워.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날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분명 깊게 내린 정서적 뿌리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자매라는 관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미 정서적 뿌리를, 비옥한 옥토를 가지고 있다.
짐을 싸고 풀어야 하는 일이, 숙소를 계속 옮겨야 하는 일이, 매번 새로운 동네에 적응해야 하는 일이 너무 억울하고 힘들었는데, 이 모든 마음을 내려놓으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삶은 어차피 여행이고, 피하지 못하면 즐겨야 하는 것이니. 여행을 떠나듯 짐을 싸야겠다.
위 글은 쭘마인밀란 매거진 23호에 수록된 글을 수정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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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 적응해가는 저희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