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쓰는 사람, 쓰는 데로 사는 사람

3장. 작가라는 무게를 견디기 위해

by 선량

서이초 선생님의 사건 이후 교권침해와 악성부모들에 대한 기사가 끊이질 않는다. 우리 때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정년도 보장되고, 방학도 있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존경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었는데 지금은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시달리는 가장 극한의 직업이 된 듯하다.

우리나라는 “갑”과 “을”의 관계가 너무 명확한 나라이다. 을이었을 때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갑의 위치에 서면 절대적으로 갑질을 해대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갑을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 갑‘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평행선에 놓인 평등한 관계로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보살펴야 한다는 공통된 의무가 있는 어른들이다.

그런데 남보다 조금 더 배웠거나 조금 더 좋은 직업을 가졌을 경우엔 스스로 평행선을 벗어나 수직적 상하관계를 맺으려 한다.

갑질은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이슈가 된 교사-학부모 관련 기사 중에 4년 전 즈음 한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께 갑질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출신 학교와 학력을 무기로 유치원 선생님에게 협박 어린 문자를 보내고, 방과 후에도 몇 십 개의 문자를 보내 선생님의 일상을 망가뜨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 말미에 그 엄마가 책을 출간한 작가이며 그걸 알게 된 익명이 네티즌들이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그 책에 별점테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교사에게 갑질을 했던 엄마가 이번엔 (무명의) 독자들에게 갑질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책에 대한 한줄평 역시 가볍지 않았다.


“글과 행동이 다른 분“

”덕분에 위선을 배웠다. “

”작가의 삶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그 부분이 재밌다. “



이 기사를 접한 후, 즐겁게 써 내려가던 글이라는 도구가 순간 바윗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들이 언젠간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진 않을까?

지금까지 나는 어떤 글을 썼던가?




“프랑스 학교에 보내길 잘했어“ 라는 첫 번째 책을 쓰고 출간할 때 많이 두려웠다. 내 아이들에 관한 책이어서 더 그랬고, 혹시나 내가 쓴 글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입진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책을 썼을 때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아직 어렸기에 아이들의 교육 환경과 아이들의 삶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내 육아에 대한 확신보다는 그저 책을 출간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럴 때 오류와 위선이 발생할 수 있다.

문장으로 나를 포장하긴 너무 쉽고,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포장된 글로 나를 접하기 때문이다.



내 첫 책은 잘 팔리진 않았지만, 4~5년 전에 브런치에 썼던 프랑스 학교와 아이들에 관한 글이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잊을만하면 “좋아요“ 알람이 울리고, 댓글이 달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을 되돌아본다.

이제 훌쩍 커버려 한 달 뒤면 프랑스 학교의 중학생이 되는 큰아이와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둘째를 보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헤아리게 된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를 번역하며 프랑스 교육과 학교에 대해 글을 썼던 치기 어린 초보작가 시절의 나를 소환하기도 한다. 내 욕심이 내 삶을 뛰어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책에 썼던 글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계속 프랑스 학교에 보내고, 내 책에 대한 근거를 위해 여전히 아이들에 관한 글을 남긴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또다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살았던 삶을 글로 남겼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쓴 데로 살려고 애쓴다.


언행문일치(言行文一致)의 삶.


이것은 작가에게 주어진 무게라고 생각한다.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

내 글은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대신,

화살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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