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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Feb 08. 2019

[12년 전, 네팔#3] 인생을 좌우하는 순간의 결정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내 나이 28, 29살....... 내 20대의 마지막 2년을 네팔에서 보냈다. 그 2년은 내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그 당시의 네팔은 정치적으로 과도기였다. 공산주의였던 마호이스트당과의 싸움으로 자주 스트라이크가 있었고 도로가 봉쇄되곤 했다. 통행이 금지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모습은 참 평화로웠다.


카트만두 중심지역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매우 혼잡했다. 하지만 2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완연한 시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말이면 복잡한 카트만두 도시를 떠나 이런 시골길을 다니곤 했는데, 일 때문에 느꼈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곤 했다.



친했던 봉사단원들 몇 명이서 고아원겸 호스텔에 방문해 아이들과 놀아주고, 게임을 하며 주말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는 내 마음의 여유가 훨씬 넘쳤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걱정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날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네팔은 국교가 힌두교지만 곧곧에 라마불교의 유적지와 잔재가 남아있다.
히말라야 부근의 산속에 살고 있는 부족은 대부분 라마 불교도이다. 그래서 트레킹 하는 산속 곳곳에는 불교 사원이 있다. 아마도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인도 남쪽에 위치한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 “룸비니”가 있어서 일 수도 있다.



보우더낫은 카트만두에 위치한 가장 큰 불교 사원이다. 이곳은 규모가 매우 큰 사원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난 이곳을 좋아해서 여러 번 방문을 했다. 특히 보우더 낫 앞에 로컬 식당에서 파는 모모(네팔식 만두)가 정말 맛있었다. 이 사원을 빙글빙글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들 행복하기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난 지진 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 매우 안타까웠다.




네팔 코이카 단원들은 1년에 한 번 의료캠프를 했다. 시골지역으로 가서 의료 봉사를 하고, 시골 아이들과 놀아주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다. 간호 파트였던 나는 의료팀으로 함께 했다.

의료시설이 열악하거나 아예 의료시설이 없어서 간단한 질환임에도 적절하게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영양실조도 워낙 많아서 영양제나 비타민이 만병통치약이 되곤 했다.



휴일이 되면 자전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끼리 하이킹을 가곤 했다.
카트만두 도시를 벗어나면 산들이 빙 둘러 있는데, 그 시골 산길을 자전거로 달리면 그렇게 좋았다. 뭔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요일이면 네팔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네팔에는 특히 젊은 청년들과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대부분 코이카 또는 ngo봉사단원들이었는데 다들 혈기왕성 한때에 이곳에 와서 자기들의 젊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네팔 카트만두에는 한인교회가 딱 하나 있다. 종파나 계파와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먹는 한 그릇의 점심은 너무 꿀맛이었다.


난 그곳에서 찬양단으로 섬겼다.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었는데 찬양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네팔에서는 과거의 내 모습과는 다르게 적극이고, 당당한 나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 그를 만난 날, 나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찬양 연습을 하고 있었다. 찬양 인도를 하던 친구는 며칠 전에 한국에서 온 형제가 베이스 기타를 치러 올 것이라고 했다.  한 30분쯤 후에, 이제 막 네팔 생활을 시작한 아이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노랗게 물이 들어있고, 얼굴은 밀가루처럼 새하얀, 그 아이의 두 귓볼에서는 작은 큐빅이 반짝이고 있었다. 삼색 슬리퍼를 찍찍 끌고 들어온 그 아이는, 나보다 2살이 어린 동생이었다.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반항을 시작하는 청소년 같은 이미지의 그 아이는 베이스 기타를 칠 때만큼은 열정적으로 쳤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찬양할 때만 잠깐 만나는 사이였으니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반항기가 가득해 보이는 그 아이가 조금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을 아는 누나, 동생으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가 자꾸 주말에 자전거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다. 산악자전거가 없었던 난 거절을 했지만, 그는 자기가 빌려오겠다며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제가 왜 저러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왜 가자고 그러지?’

네팔에서 그다지 남자들과 역이고 싶지 않았던 난, 몇 번을 거절했다. 그러다 친하게 지내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자고 해 선뜻, 날을 잡고 말았다.


그렇게 주말이면 몇몇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조금 친해진 우리는 따로 만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반항아에 껄렁껄렁한 아이인 줄 알았던 그는 날마다 기도를 하고, 새벽기도를 나가고, 항상 성경을 읽는 아이였다.


4월에 교제를 시작한 우리는 5월에 헤어졌다. 아니, 그가 임기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7개월 동안 네이트온과 스카이프로 연애를 했다.


그리고 난 서른이 되기 한 달 전, 추운 12월에 귀국을 했다.


2013년 봄, 우리는 다시 네팔을 찾았다. 지안이가 16개월이었고, 뱃속에 소은이가 있었다. 다시 찾은 네팔은 느낌이 달랐다. 아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느낌이 확연이 틀렸다.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그 길이 아이를 안고 다니려니 너무 힘들었다.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던 그 길이 왜 이렇게 먼지 투성이던지.... 혹시나 먼지 때문에 아이가 아플까 걱정이 되었다.

네팔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변해 있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살고 계신 분들이 계셨다.


그때 이용만 박사님은 저 멀리 지방으로 혼자 내려가셔서 어느 작은 병원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사모님께서는 홀로 남아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인석이는, 네팔에 다른 팀으로 와서 봉사했던 주혜와 결혼을 하여 네팔 코이카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벅터 풀 병원에 방사선사로 함께 일했던 친구 경호는 같은 시기에 파견된 같은 기수 선미와 결혼을 해서 네팔 한국대사관에서 행정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수진이와 태준이는 함께 네팔 한인교회 청년회를 했었는데 결혼한 후 네팔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다


한번 네팔을 다녀온 사람들은 쉽게 네팔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가거나, 거기서 아예 살거나, 몇 년 뒤라도 다시 꼭 찾아간다.



네팔에서의 2년이 우리 가족의 삶을 이끈다. 방글라데시에 가게 된 것도, 이곳 인도에 오게 된 것도, 그때의 젊은 날의 추억과 용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지금은 겁도 많아졌고, 용기는 사라졌지만, 함께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다. 그 시절에는 하루하루 특별하게 살았었지만, 지금은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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