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아줌마들 사이에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싱글, 사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노트에 ‘묘사’라고 적었다. 그 앞으로 쉼표와 마침표가 크게 쓰여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사해는 5개월 전에 휴직을 했다. 숨 가쁘게 달리기를 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드디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상태. 사해는 자신이 꼭 그런 상태라고 생각했다. 일상에 쉼표를 찍고, 한숨 크게 내쉬면 다시 예전처럼 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휴직을 한 지 5개월이 돼버린 것이다. 이러다 사회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인 아닌지 불안하던 차에 선량한 글방 모집 공고를 보고 들어온 사해였다.
“자 다음은 누가 해볼까요? 음…. 사해님? 준비되셨어요?”
“아,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사해는 노트를 내려놓고 노트북 화면에 열려 있는 워드로 눈길을 돌렸다.
암막 커튼 사이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옅은 눈 꺼플이 오늘따라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 길지 않아 언제나 불만이었던 속눈썹 한 올 한 올의 무게가 느껴졌다. 평소엔 의식조차 하지 않는 안면근육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눈이 살짝 떠졌다.
사해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동그란 알람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11시가 지나 있었다. 알람을 맞춰 규칙적인 생활을 해보겠다며 다이소에서 사 온 시계였다. 하지만 사해는 알람 소리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 아침 7시에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매번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전 11시가 지난 후에 겨우겨우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먹은 약기운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몽롱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해가 암막 커튼을 열자 한줄기 빛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의 유일한 스케줄인 병원진료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다. 사해는 몽롱한 발끝을 질질 끌고 욕실로 향했다.
“감 사해 님. 들어오세요.”
“네.”
사해는 익숙하게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엔 어느새 라뽀가 많이 형성된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만이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요즘도 약 때문에 그런지 많이 졸려요. 특히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니요.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아침이니까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요. 계속 이렇게 게으름 피우다가 다시 사회생활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돼요. 약을 좀 줄이면 안 될까요?”
“음…. 휴직기간이… 얼마나 남았죠?”
“한 달 반 정도 남았어요.”
“근데 뭐가 걱정이죠?”
“네?”
“다시 복직하기까지 한 달 반이나 남았잖아요. 그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게으름을 마음껏 피워보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남들 모두 출근하고 일할 시간인데 잠만 자고 있으니 뭔가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제가 막 루저 같고,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우울해져요. 어릴 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도 가고, 병원 실습도 진짜 열심히 했고, 그 어렵다는 시험도 한 번에 통과해서 보건 교사가 되었는데….. 저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 제가 이렇게 졸린 눈으로 지내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나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이제 한달 반 밖에 안 남았는데, 그동안 제가 좋아질지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 약을 좀 바꿔보면 안 될까요?”
“사해 님은 잘못한 게 없어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도 다들 인정할 거예요. 단지 몸이 아파 휴직을 하셨고, 지금은 잘 쉬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았어요. 그동안 또 지켜보도록 하죠. 지금 가장 힘든 건 뭐죠?”
“자꾸 억울한 마음이 들어요. 그 학교에 보건교사는 저 혼자 뿐이었는데, 제가 어떻게 3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일일이 다 체크할 수 있겠어요. 제가 코로나를 퍼트린 것도 아니고…..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던 아이가 거짓말을 한 건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초기 대응을 잘못했다고 다들 저한테만 뭐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 학년 전체로 퍼져나갈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요.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선생님들도, 보건소에서도… 다들 저한테만 뭐라고 했어요. 그게 너무 억울해요. 전 정말 열심히 했다고요.”
잠잠했던 사해의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억울한 마음이 다시 우울한 마음으로 , 우울한 마음은 다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사해님 남은 기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걸 해보세요.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할 수 있는 일 말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세요. 그게 생산적인 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사해님의 억울한 마음, 우울한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일. 그 일을 찾으세요.”
사해는 처방전을 들고 1층 약국으로 향했다. 약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 5개월 동안 매번 같은 상담을 했고, 매번 같은 약을 처방받았다. 이번엔 일주일치 약만 받았다. 일주일 동안 같은 약을 더 먹어보고 다시 내원하기로 했다.
그날 밤에도 사해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휴직 후 밤과 아침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벽 1시까지 넷플릭스를 보다가 낮에 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꼭 해보고 싶은 일, 후회하지 않을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그게 무엇일까….
사해는 넷플릭스를 끄고 밀리의 서재로 들어갔다. 내 서제에 저장해 놓은 책들은 죄다 삶의 용기를 주는 책,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이런 책들 말고 뭔가 새로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에세이를 검색하다 처음 본 책을 하나 발견했다. 저자 역시 낯선 이름이었다. 저자 소개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종합병원에서 일했던 전직 간호사. 지금은 밀라노에 살며 글을 쓰는 작가.”
‘간호사 출신 작가라고?’
사해는 같은 간호사 출신 작가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거기엔 작가의 sns 주소가 나와있었다. 책을 다운로드해놓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그 작가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그 작가의 게시물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선량한 글방 회원을 모집합니다. 온라인으로만 진행합니다.”
그때 사해의 마음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