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영
“아빠, 잘 다녀와~”
“응, 현수도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어린이집 잘 다녀와.”
“아빠 오늘 일찍 와?”
“응. 오늘은 저녁에 올 거야. 근데 저녁밥 먹은 후에 오니까 아빠 기다리지 말고 할머니랑 먼저 저녁 먹어야 해. 알겠지?”
“아이고, 늦겠다. 얼른 가.”
“예. 엄마. 다녀올게요.”
“아빠, 빠빠이~”
준영은 현수를 한번 더 꼭 껴안은 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3월, 이른 아침의 공기는 아직 쌀쌀했지만, 며칠 전보다는 포근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준영은 얇은 패딩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이번주에는 봄 옷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없을 때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니 추운 날에도 추운 줄 몰랐고, 더운 날에도 더운 줄 몰랐다. 그 친구들 중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은 오로지 상철이 하나다.
지민이 자신의 부모님 몰래 아이를 낳고, 준영에게 아이를 넘긴 후 홀연히 고향집으로 떠나버린 후 준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지민의 부모님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지민과 했던 약속 때문에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널 좋아했지만, 너랑 평생 함께 살 자신은 없어. 너희 엄마 모시고 살 수도 없어. 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아주 평범하게. 네가 아기를 지우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지금 이만큼 커버렸어. 이제 네가 책임져. 내가 아기를 낳아줄 테니까 키우는 건 네가 해. 나한테 모성애 이런 거 기대도 하지 마. 그리고 아이 낳은 후에 나는 부모님 집으로 들어갈 거야. 서울에서 임용고시 준비하려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서 살고 싶지가 않아. 고향 가서 다시 공부할 거야. 그러니까 나 찾지 마.”
현수가 15개월이 되었을 때 지민이 결국 임용고시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부산 어느 중학교의 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학교의 수학 선생님과 결혼을 했다는 말도 들렸다. 준영은 지민이 결혼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와 결혼하는 것이 싫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홀어머니에 외동아들,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결혼 상대였을 것이다. 게다가 졸업도 하기 전이었으니, 돈도 직장도 미래도 불투명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던 지민을 떠올릴 때면 쓴웃음이 났다. 바라던 데로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준영은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싫었다. 거의 종점에 가까운 곳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다. 드디어 발화역에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바쁘게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겨우 지하철에서 내렸다.
준영의 직장은 발화역에 있는 '참좋은 병원'이다. 외과와 정형외과를 주로 보는 병원으로 통증 클리닉과 물리치료실이 함께 있다. 큰 병원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실력이 좋기로 꽤 유명한 병원이다.
준영은 처음에 이 병원에서 허드렛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현수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대학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였지만, 다른 일에 비해 보수가 괜찮은 편이었다. 야간 당직을 서면 야간수당을 더 받을 수도 있었다. 그 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은 환자들을 수술실로 옮기거나 회복실에서 병동으로 환자를 옮기는 일, 환자를 물리치료실로 옮기는 일이다. 하지만 병동 간호사들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한다. 남자 환자의 수술 전 관장, 제모는 물론이거니와 가끔 소동을 일으키는 환자들을 제압하는 일까지. 일의 영역은 꽤 넓었다.
하지만 준영은 이 일이 좋았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의사와 간호사의 책임이다. 진료 기록에 사인을 하는 사람도, 환자에게 처방을 내리는 사람도 모두 의사나 간호사다.
병원에서 일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걸 준영은 병원에서 일한 후에야 알았다. 병원엔 의사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원무과 직원들, 방사선사, 물리치료사, 임상병리사, 청소를 해주는 여사님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준영은 정해진 시간에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면 되었다. 시간에 잘 맞춰서 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 정도의 책임감은 꽤 가벼운 일이었다. 준영은 현수를 책임지는 그 일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병원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준영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 봐왔던 김간호사님이 지금은 책임 간호사가 되었다. 준영이 간호조무사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고, 가끔 현수의 간식이나 옷, 신발 등을 챙겨주기도 하는 자상한 분이다.
준영이 병원 현관문을 열고 막 들어설 때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촌 누나였다. 준영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누나는 준영이 아기였을 때 본인이 직접 업어서 키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준영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준영아, 출근하니?”
“응. 누나. 아침부터 웬일이야?”
“이번주 주말에 뭐 하니? 현수 데리고 놀러 와. 누나가 요즘 집에 있어서 많이 심심하다. 현수 보고 싶어.”
“응, 이번 주엔 2시에 끝나니까 현수 데리고 갈게. 은서는 잘 지내?”
“말도 마, 말도 하나도 안 듣고. 중2라고 아주 대놓고 짜증을 낸다니까. 아참, 나 다음 주부터 온라인으로 글쓰기 하기로 했는데, 너 관심 있니?”
“글쓰기? 갑자기 웬 글쓰기?”
“응, 사실은 은서 글쓰기 선생님 알아보다가 괜찮은 걸 하나 찾았거든. 생각해 보니 너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작가였잖아. 너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누나랑 같이 안 해볼래?”
“음…. 좀 민망한데… 누나랑 같이 한다는 게…”
“뭐,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면 되지. 우리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지. 어차피 직접 만날 사람들도 아니고, 온라인으로만 하는 거래. 그 작가가 해외에 산대.”
“그래? 그럼…. 생각 좀 해볼게.”
“누나가 참가 신청서 보내줄 테니까, 일단 같이 하자. 나도 아는 사람 한 명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신청은 했지만 좀 떨리거든. 누나는 글도 잘 못 쓰는데.”
“근데 왜 했어?”
“음… 그냥? 20년 넘게 일하다가 집에만 있으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고 밖에 나가 사람들 만날 수도 없고 말이야. 내가 집만 가까우면 우리 현수 봐주는 건데. 아쉽다.”
“알겠어, 누나. 나 일단 출근해야 해서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수고해~”
준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3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글쓰기를 함께 하자는 누나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상에 바빠서 어렸을 적 꿈은 저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지만, 여전히 책을 좋아하는 준영이었다. 병원 일이 한가할 때면 준영의 손엔 여지없이 책이 들려 있었다. 지금도 가방 안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준영은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나이트 근무자들이 퀭한 눈으로 데이 근무자들에게 인계를 하고 있었다.
“김 선생님, 412호 김병석 환자 8시 수술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외과병동 책임간호사인 김 간호사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준영은 병동 한쪽에 놓인 이동침대를 밀고 412호실로 향했다. 매우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 다른 날과 다른 것 같다고 준영은 생각했다.
준영은 이번엔 정말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