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매장에서
결혼할 때 특별한 프러포즈도 이벤트도 없었다. 그저 커플링을 내밀며 "나랑 결혼할래?"가 전부였다.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꽤 서운했다. 그래도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인데.... 그의 "결혼할래?"라는 질문에 "이게 뭐야~ 무슨 프러포즈를 이렇게 해~~"라고 말하고 말았는데, "아니!!! 안 해!!!"라고 말했어야 했었나....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10년 넘게 살고 있다.
딸 넷, 아들 하나 중 넷째 딸인 나는 선물을 많이 받아보지 못했다. 옷과 신발은 언니들이 입고 물려준 것이었고, 생일날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형편에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선물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라는 걸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선물 주는 것을 좋아한다. 비싸고 좋은 선물 보다도 작고 소소한 선물을, 특별한 날 보다도 평범한 날에 문득문득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마트에 갔다가 아이 생각이 나서, 그냥 사주고 싶어서,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선물을 사주곤 한다.
사실 나도 그렇게 선물을 받고 싶다. 길을 가다 내가 생각이 나서, 꽃을 보니 내가 떠올라서, 그냥 사주고 사주고 싶어서 주는 선물을 받고 싶다.
프러포즈 이벤트도 없었는데 다른 이벤트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함께 사는 동안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꼭 그걸 남자가 해야 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전 해봤답니다~~"
생일날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서프라이즈를 해주기도 했고 (비록 맛은 없었지만),
몇 개월 동안 노트에 편지를 써서 주기도 했고, (비록 결혼 전이지만),
명품 시계를 사주려고 돈을 모으기도 했고, (비록 그가 스마트 워치를 원해서 인터넷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제는 나도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많이 무뎌졌다. 주면 땡큐, 안 준다면 현금으로 받기!
이번 결혼기념일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전날에도 싸웠던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하려던 찰나에 갑작스럽게 오스트리아 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컵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채운 후 숙소에 준비되어 있던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였다. 이탈리아에만 있는 줄 알았던 모카포트를 인스브루크에서 만나니 왜 그렇게 반갑던지.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온 방으로 퍼졌다. 남편과 아이들은 이네 유튜브 삼매경에 빠졌고, 나는 작고 예쁜 컵에 커피를 담아 창밖으로 보이는 알프스의 설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좋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집이 아닌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는 게 그냥 좋았다.
"나가자!"
아직 쌀쌀한 날씨인지라 겨울 점퍼를 걸치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해?"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여기로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이 안내를 해야지, 아무 생각 없는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지??
괜찮다. 나에겐 구글맵이 있으니까. 바로 구글맵을 열어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다. 멀지 않은 곳에 구시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전시장"이 있었다.
"이쪽으로 가자. 나만 따라와!"
나는 느릿한 아이들과 남편을 이끌고 위로 위로 걸어 올라갔다.
구시가지로 걸어가니 곳곳에서 여행객들이 나른하게 앉아 술이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너고 번화가를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고 싶었던 곳에 다다랐다. 바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전시장이었다.
스와로브스키는 1895년, 오스트리아 티롤에서 시작된 크리스털 기업이다. 127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액세서리, 주얼리, 광학 장비, 홈데코 아이템 등을 개발하여 여러 나라에서 판매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제품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tax free로 구입할 수 있어서 오스트리아에 여행을 온 사람들은 꼭 들르는 곳이라고 한다.
사실, 이곳에 들르기 전까지는 이런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대충대충 여행자에게 사전조사란 있을 수 없는 법. 우연히 구글맵에서 보고 들른 것일 뿐이었다.
전시장이라고 해서 들어간 곳에는 액세서리 매장도 함께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 왕방울만 한 크리스털 펜던트.
문득, 신혼여행 갔다가 마닐라의 진주주얼리 매장에서 싸웠던 게 떠올랐다. 화해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또 싸우고 싶진 않다. 조용히 둘러만 보고 가야지....
"생각보다 싸네? 하나 골라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하. 나. 골. 라. 봐!!!!!
"엄마, 아빠가 하나 고르래. 이거 어때? 이거 예쁜데? 아빠 나는? 나도 하나 골라도 돼??"
옆에 있던 아이들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이지? 두말하기 없기다. 나 진짜 고른다!!!"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가장 저렴한 것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팔찌 말고 목걸이 골라봐. 예쁜 거 많네."
"진짜? 왠일이야?"
"결혼기념일 선물이야."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낯선 도시에서 받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선물은 그의 계획에 없었던 것 같다. 조금은 충동적인 언행이었을 것이다.
그와 살면서 계획 없이 소비했던 습관이 사라진 것처럼,
그는 나와 살면서 계획 없이 소비하는 충동이 생긴 모양이다.
어쨌든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의 기쁨은 몇 배 더 기쁘다.
아니면 나한테 뭐 잘못한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