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story, short!
밀라노라는 고유명사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품사다.
나에게 어울리는 건 폭스바겐이 달리는 거리가 아니라 릭샤가 뒤엉켜 굴러가는 신작로, 피자 위의 달큼한 토마토 향이 아니라 진한 카레 향이 나는 곳이 아닐는지.
이런 한계를 만드는 건 다름 아닌 바로 ‘나’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밀라노'라는 고유명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한없이 쪼그라드는 심장을 따라 어깨까지 움츠려드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우리가 어쩌다 밀라노에서 살게 되었는지 말하려면 과거로 과거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내 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 그 시간을 좀 더 거슬러 나와 남편이 만나기 전.
아니, 아마도 우리가 밀라노에 왜 살게 되었는지를 말하려면 태초의 시간으로까지 역행해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밀라노에 살게 된 것이 말씀과 빛으로 세상을 창조한 것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결단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졌다면,
우리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라노 어때?”
내 삶과 겹치는 부분이 한 페이지도 없어서 좋다거나 싫다는 단답형으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찍는 것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 문제는 유형조차 알 수가 없다. “밀라노는 어때?”라는 질문은 “송중기 어때?”와 비슷한 질문이었다.
‘어때?’라는 질문에 오히려 내가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밀라노에서 살면 어떨 것 같냐고….”
말 끝을 흐리며 질문하는 그 역시 ‘밀라노’라는 도시에 확신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밀라노는 무슨. 우리에게 이탈리아가 가당키나 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한국 가서 뭐 하며 살지나 고민하자고.”
야심 차게 시작한 우리의 해외생활이 10년 만에 막을 내릴 찰나였다.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서 영어 공부를 시키고, 저렴한 가격에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두어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여유를 누리며 살 줄 알았던 우리의 해외 생활은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너덜너덜해진 마음만 남아있었다. 이제 그만 이런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보자고 한 건 바로 나였다.
“내가 병원 취직을 다시 해볼게. 자리가 정 없다면 요양병원에서라도 일 하지 뭐. 요즘 요양 보호사 돈 잘 번다고 하던데.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막연한 미래는 불안과 걱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헛된 희망을 가져다준다.
“서울에 집 살만큼은 벌어 뒀냐?”
해외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 감각이 없다 치고, 한국에 버젓이 살고 있는 친정아버지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뒷목을 잡았다.
라떼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나가 3년만 일하고 오면 집 한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었다는 말,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번 돈으로 논을 사서 할아버지에게 줬다는 사실은 역사가 되어 기록으로 남은지 오래인데 친정아버지는 그 역사의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아부지, 서울 집 값이 얼마인지는 알아요??”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건지, 아니면 우리가 그만큼 많이 벌었다고 생각해서 물어본 건지 여전히 모를 일이다. 희한한 것은 논과 밭만 있는 저 남쪽 끝, 고흥 읍의 아파트 한 채가 3억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해외생활을 10년이나 했지만, 돈도 많이 못 벌었고, 집도 없으며 몸도 마음도 아프다는 현실은 우리를 패잔병처럼 느끼게 했다.
우리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서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도시, 밀라노를 고려하기 시작한 건 부모님의 반응도, 우리의 희망도 아니었다. 바로 아이의 눈물 섞인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학교 다니기 싫어…. 조금만 더 해외에서 살고 싶어….”
우리는 그런 부모가 아닌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부모, 자녀의 교육을 위해 부모의 시간을 버리는 부모, 아이들의 미래에 전 재산을 배팅하는 부모.
그런데 아이의 이 한마디에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부모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밀라노에 살게 된 여러 원인을 분석해 보면 단 하나의 이유만 남는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