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이야기
둘째 아이의 영어 숙제는 바로, "방학 동안 어디에 다녀왔는지 소개하는 것"이었다. '방학 동안엔 모두 여행을 간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 숙제라서 조금 기분이 나빴다.
우리는 안 가는데? 아니, 못 가는데? 여행 못 가는 사람은 어떻게 숙제를 하라는 말인 거야?
결국, 방학하기 전에 다녀왔던 돌로미티에 대해 쓰라고 말해주었다. 아이의 입이 댓 발 나왔지만, 어쩔 수 있나.... 엄마 아빠는 방학이 아닌걸???
밀라노에 인생네컷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딸아이는 이번 방학 때 거길 꼭 다녀와야겠다고 선언했다. 여행은 못 가더라도 거긴 꼭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밀라노에 생긴 인생네컷 이름은 'Life 4 cuts'.
이걸 듣자마자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생네컷을 그대로 옮겨놓음 직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Life 4 cuts"을 보며 얼마 전에 읽은 김영하 작가님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담은 책, '오래 준비해 온 대답"이 떠올랐다.
작가님이 이탈리아의 바리에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배를 타기 전, 입구의 전광판에 "Memory Lost"라는 문구가 점멸하고 있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잘 기억해 보세요"라는 의미로 쓴 문구지만, 작가님은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시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네가 잃어버린 것에는 수많은 추억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상큼했던 기억부터 햇볕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수험생에 대한 기억, 취업 준비를 하며 스트레스받았던 기억, 병원에서 처음으로 정맥주사를 놓았던 기억, 병원을 그만두었을 때의 해방감, 혼자 여행을 떠나던 때의 자유함....
나는 지금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로 과거의 기억들을 잊거나 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 사소한 기억들을 모두 안고 살기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르고 골라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들만 남기고 모두 '망각'해 버리는 것이 지금을 살고,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Memory lost"를 통해 내가 가슴에 남겨두고 잊지 않는 것들을 떠올렸다.
"메멘토 모리"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네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해석되는 메멘토 모리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Life 4 cuts"으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될 만한 네 가지를 떠올렸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간 것,
28살에 한국을 떠나 네팔에 간 것,
남편과 결혼을 한 것,
그리고 지금 여기, 밀라노에 온 것.
며칠 전, 이탈리아의 휴일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연어초밥이 먹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우리 네 식구는 일식뷔페집으로 향했다. 밀라노엔 중국인이 운영하는 일식 뷔페집이 많다. 점심때는 1인당 20유로 정도의 가격으로 무한으로 시켜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초밥과 회, 새우튀김 등등 먹고 먹고 또 먹으며 배를 채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나빌리(Navigli)로 향했다. 바로 인생네컷이 있는 곳이었다. 나빌리는 밀라노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는 동네로, 하천 양쪽으로 멋진 가게와 바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유럽의 아기자기함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인생네컷 가게에서 꽃 머리띠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빌리 하천을 걸으며 또 사진을 찍었다. 마치 밀라노에 여행 온 사람들처럼 거리를 걸었다. 바에 들러서 에스프레소와 브리오슈, 와플을 시켜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큰아이의 겨울 잠바를 사러 쇼핑몰에 들렀다. 여기저기 옷가게에 들러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잠바를 하나 사고, 딸아이가 고른 니트도 하나 샀다. 그 사이에 남편도 겨울 잠바 하나를 샀다.
이렇게 돈을 쓰고 나니, 지갑은 텅 비었다.
괜찮다. 다음 주가 월급날이니까.....
멀리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여행 같은 일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네 번째 컷을 찍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