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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Nov 15. 2023

 4. 이탈리아 인사와 인간관계

Buon giorno, salve, ciao의 차이

밀라노의 아파트

우리에겐 저녁 루틴이 하나 있다. 산책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남편을 위해 저녁을 먹고,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은 후 집밖으로 나가 아파트 주위를 천천히 걷는다. 산책을 하며 남편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하고 나는 “그래? 그래서? 그렇구나.” 등의 추임새를 덧붙인다. 남편도 나도 밀라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고작 회사 직원, 거래처 사람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전부이다. 주중에도 주말에도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쓰잘대기 없는 말을 나눌 사람도, 심각한 고민을 나눌 사람도 가족뿐이다. 덕분에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좁고 단조로운 인간관계가 심심하기만 하다.

앞동 아파트

이탈리아의 아파트는 우리나라의 아파트와 꽤 다르다. 아파트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고, 열쇠가 없으면 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들 열쇠를 주렁주렁 들고 다닌다)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열리는 최신식 출입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파트 출입문의 인터폰엔 동, 호수 대신 세입자의 이름이 붙어있다. 즉, 이름은 공개되어 있지만 그 사람이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밖에서 보기엔 삭막한 건물만 있는 것 같지만,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건물 한 중앙에 정원이 있다. 건물이 그 정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주차장은 대부분 건물 밖에 있고, 거주민 지정 주차장은 노란 줄로 표시되어 있다. (밀라노에선 주차가 정말 힘든데, 이런 노란 줄에 주차했다 간 벌금을 물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예부터 전쟁이 워낙 잦다 보니,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든 구조라고 한다.  

10년 이내에 지어진 최신형 아파트는 그 구조가 조금 다르다. 밖에서도 내부를 볼 수 있고, 아파트 게이트를 지나면 넓은 정원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빙 둘러 산책로가 있고 작은 놀이터가 있다. 대부분의 아파트엔 지하에 차고가 있는데 각각의 차고 역시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차량 도난사건이 워낙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식 아파트라고 하면 10층 이상의 고층 빌딩에 여러 동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단지를 상상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10층 이하이다. (최근에 지은 아파트는 고층도 있고 밀라노 바깥 지역엔 아파트 단지가 크게 있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7층 건물 2개가 ㄱ 자 모양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위로 높진 않지만 옆으로 긴 형태이다. 총 6개 라인에 두 가구씩 살고 있으니, 세대수는 적지 않다.





이웃사촌

우리 아파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은데, 너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도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도, 애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저녁 시간이 8시부터이기 때문에 저녁밥 먹느라 조용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방음 장치가 엄청나게 좋은 걸까? 짐작만 할 뿐이다. 하긴 여기서 사는 2년 동안 층간소음을 듣지도, 시끄럽다고 항의를 받지도 않았다. 가끔 새벽에 자다 깬 어느 집 아기의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만 들었을 뿐.

이 싸늘하고 고요한 저녁 산책을  우리는 매일 즐긴다.



딴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왜 인사 안 해?”

“응? 왜? 뭐? 누구 있었어?”

“아까 아줌마가 지나가면서 인사하고 갔잖아.”

“그래? 나 못 봤는데?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Buona sera, 보나세라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했잖아. 인사도 안 하는 코리안이 산다고 소문날라.”

“나 진짜 못 봤는데….”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다 보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파트 주민들을 만난다. 그러면 그들은 꼭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낮에는 “Buon Giorno, 부온 조르노(좋은 아침이에요)”, 저녁엔 “Buona sera, 부오나 세라 (좋은 저녁이에요)”, 밤에는 Buona note, 부오나 노떼(좋은 밤이에요).


‘어디서 만났던가?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

곰곰이 되짚어보지만,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만났으니, 이웃사촌으로서 인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아파트의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소문이 난 것일까??

눈만 마주쳐도 인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도 점점 더 인사 잘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탈리아의 다양한 인사말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인사말이 있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Buon Giorno!”

부온 조르노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말할 수 있는 인사이다. 친구, 선생님, 아는 사람 또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고, 장소, 나이에 상관없이 말할 수 있다. Buon은 “좋은”이라는 뜻이고, Giorno는 “날”이라는 뜻이니, 부온 조르노는 “좋은 날입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바로, 부온 조르노일 것이다.


영어의 Good afternoon에 해당하는 말도 있다. “buon pomeriggio, 부온 뽀메리죠”라고 하는데, 사실 이탈리아에서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다들 해가 있는 상태에선 ‘부온 조르노’로 인사한다.


Good evening에 하는 말은 “Buona sera, 부오나 세라”로 “좋은 저녁입니다”이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저녁인사인 “부오나 세라”라고 말해야 할지 항상 헷갈린다. 오후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점원에서 “부온 조르노”라고 인사하면 “부오나 세라”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오후 4시쯤이면 부오나 세라라고 인사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인사는 바로, “salve, 살베”이다. 부온 조르노나 부오나 세라 보다 조금 캐주얼한 인사로, 때와 사람에 상관없이 말할 수 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지 모를 때, 처음 본 사람과 인사할 때, ‘부온 조르노’라고 해야 할지, ‘부오나 세라’라고 해야 할지 헷갈릴 때 “Salve”라고 인사하면 된다.


가장 캐주얼한 인사는 “Ciao, 차오”이다. 영어로 치자면 “Hi”라고 할 수 있겠다. 친구들, 가족들처럼 아는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나 직장 상사에게 하면 버릇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부온 조르노와 살베, 차오의 미묘한 차이를 알게된 후 “Ciao!” 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왠지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 뉘앙스, 아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란?

집 근처에 블루 아이스라는 단골 바가 있다. 이탈리아의 바는 커피도 팔고, 젤라또도 팔고, 와인이나 맥주도 파는 곳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다. 블루 아이스 바에서 나는 스프릿츠 칵테일을, 남편과 딸아이는 젤라또를, 아들아이는 콜라를 마신다. 그 바의 사장님은 중국계 이탈리안으로 이탈리아 말을 꽤나 잘하지만, 영어는 못한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부온 조르노” 또는 “부오나 세라” 하고 인사한다.

이탈리아어를 너무 못하던 나는 이 블루 아이스 바의 사장님과 친해진 후 이탈리아 말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바에 들렸다. 나는 아저씨가 먼저 인사하기 전에 큰 소리로 “Ciao”하고 인사했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Ciao, Ciao” 하고 화답했다. 나는 떠듬거리며 카푸치노 한 잔과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그리고 며칠 전 이탈리아어 수업시간에 배운 말을 꺼냈다.

“Come ti chiami, 꼬메 띠 끼야미?”

직역하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불립니까?”인데, 이름을 물어볼 때 쓰는 말이다.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Hu”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름을 알았으니, 그다음 말을 이어서 해야 하는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이탈리아 말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카푸치노를 호로록 마신 후, “차오, 보나 조르나따 (안녕, 좋은 하루 보내)”하고 인사한 후 바를 나왔다.


그제서야 아저씨 이름만 물어보고, 내 이름은 알려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는 갑자기 자기 이름만 물어보고 가버린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건 아는 사이인 걸까?

모르는 사이인 걸까?


이탈리아엔 두 종류의 아는 사람이 있다.

Ciao! 하며 인사하는 ‘그냥 아는 사람’과 Ciao로 시작한 대화를 언제 끊어야 할지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대화로 아는 사람”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말이 많고, 목소리도 큰 편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주위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크게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멈춰 끝이 없는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어떤 분은 우연히 만난 동네 사람과 1시간 동안 길에 서서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아파트에 산지 2년 차가 되었지만, 여전히 “챠오!“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그냥 아는 사람’인 이유는, 우리가 이탈리아 말을 2년 차가 되도록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물리적 거리와 마음적 거리

일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가을의 햇살이 눈부셨다. 차가운 바람과 다르게 내려앉은 따뜻한 햇살에 문득 언니가 생각났다. 나는 보이스 톡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밀라노는 점심시간이었지만, 한국은 저녁 시간이었다. 아마도 저녁을 먹고 한숨 돌리는 시간일 것이다.


"량아, 웬일이야?"


언니는 언제나 나를 량이라고 부른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아줌마가 된 지금도 그렇다. 언니가 "량아~"라고 나를 부르면 나는 싱그럽다 못해 반짝이던 20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나보다 7살이나 많은 언니는 내가 스무 살 때 처음 만났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던 언니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겼을 때,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 본인이 직접 의료인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다시 간호대에 온, 잔다르크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좁은 강의실에서 의학용어를 외우고, 병원 실습을 나가고, 함께 간호사 면허시험 준비를 하면서 헤어진 남자친구 또는 서운하게 했던 친구들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대화의 끝을 알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


언니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나누었다. 비싼 국제전화를 하지 않아도 보이스톡으로 이렇게 안부를 길~~ 게 물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일하느라 햇빛을 못 보고 산다는 언니에게 지금 내리쬐는 밀라노의 햇빛을 전하고, 가족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했다.


"전화해 줘서 고마워~ 가까이 살아도 전화 한 번 안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넌 제일 멀리 사는데 가장 연락을 많이 해주네. 너랑 말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아. 고맙다."


언니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산다고 해서 더 친밀한 것은 아니며,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야 더 깊고 길~~게 가는 사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내 카톡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중 절반은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네팔에서 만난 사람, 치타공에서 만난 사람, 다카에서 만난 사람, 뭄바이에서 만난 사람, 뉴델리에서 만난 사람, 밀라노에서 만난 사람.

하지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얼마 없다.

가까이 살 때는 자주 연락을 하고, 만났을지라도 나라가 바뀌고 거리가 멀어지면 연락도 뜸해진다. 2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카카오톡에서 삭제를 하기엔 매정하게 관계를 싹둑 끊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켕긴다.

연락을 주고받진 않지만, 내 카톡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냥 아는 사람들“이다.

“챠오” 인사하고 지나쳐도 서운해하지 않는 관계.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고, 어쩌다 안부를 물으면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사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

그냥 아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관계이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상처를 입을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어서 편하다.

2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어도 카카오톡에서 삭제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음적 거리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관심이란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일지라도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아는 사람보다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 지금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라는 의미로 이름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나이는 몇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요즘은 이런 관심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 대해 자세히 묻는 건 스토커로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이고, 나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건 범죄의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동물들보다 더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건 어느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정통적인 가족의 모습 대신 반려견과 새로운 형태의 반려족을 이루는 것도 이해가 간다. 반려견은 언제나 주인을 사랑하고, 큰 관심을 보이며, 가장 반겨주니까.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을”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니 주인과 반려견의 관계는 깨지지않고 오래 가는 것 같다.


반려견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서툰 이번 생도  조금은 즐거울 것이다….

역시, 중요한 건 “관심”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블루 아이스 바의 사장님 이름만 물어보고, 내 이름은 알려주지도 않았던 게 떠오른다. 순간 아저씨는 날 어떻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조금 더 친한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일은 “챠오“로 간단하게 끝내지 말고, 아저씨의 자녀가 몇인지, 아이들 나이는 몇 살인지 물어봐야겠다.

과연 내가 아저씨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잘 아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부디 나를 스토커로 오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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