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Dec 27. 2023

10. 밀라노의 크리스마스엔 빠네또네를 먹는다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걸 알기, Panettone


11월 말이 되면 밀라노의 거리는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거리마다 반짝이는 전구로 장식을 하고,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전구를 내다 건다. 밀라노 중심가인 두오모에는 스와로브스키 브랜드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는 구찌에서 만든 트리까지 더해져서 볼거리가 더욱 다양해졌다.

탐나는 구찌 트리



밀라노에 온 후 생전 처음 알게 된 문화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문화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바로 “어드벤처 캘린더, Adventure calendar”이다. 이 캘린더에는 12월 1일부터 25일까지 요일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해당 날짜의 박스를 열면 초콜릿이나 선물이 들어있고, 25일이 되면 가장 큰 선물이 들어있다.

딸아이와 같은 반 친구들의 엄마들은 이 캘린더를 직접 만들고, 선물도 직접 준비해서 캘린더에 넣어둔다고 한다. 아침마다 해당 날짜에 담긴 선물이나 초콜릿을 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문화를 전혀 몰랐던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드벤처 캘린더를 사주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남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가서 아이들이 원하는 선물을 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12월 1일, 학교에 간 아이는 “넌 오늘 뭐 나왔어?”라고 묻는 말에 엄마가 안 사줬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곤 이런 말을 들었다.


 “너네 엄마 진짜 이상하다….”


졸지에 나는 이상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유럽 아이들에게 어드벤처 캘린더는 우리의 설날에 떡국을 안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결국 나는 ‘이상한 엄마’가 아닌 ‘평범한 엄마’가 되기 위해 초콜릿이 들어있는 어드벤처 캘린더를 사주었다….

다 빼먹은 어드벤쳐 캘린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빠네또네 Panettone이다. 빠네또네는 밀라노지역 전통 빵으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즐겨 먹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다. 둥그런 모양의 빵 안에 건포도나 말린 살구, 또는 견과류가 들어있다. 이맘때쯤이면 마트에서 각종 빠네또네를 팔기 시작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빠네또네를 선물하기도 한다.


빠네또네의 유래는 조금 특별하다. 이 특별한 빵의 시작은 15세기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의 궁정에서 지역 귀족들을 위해 호화로운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궁정 요리사가 오븐에 디저트를 넣은 것을 깜빡하고 태워버리고 만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실의에 빠진 그의 앞에 주방 도우미 중 한 명인 토니(Toni)가 나타났다. 토니는 다음날 아침에 먹기 위해 식료품 저장실에 남겨놓은 밀가루, 버터, 계란, 레몬껍질, 건포도 등을 가지고 와서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궁정 요리사는 걱정하며 그 디저트를 파티 테이블에 내어놓았다. 그런데 모두가 그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 성의 주인인 Ludovico il Moro가 그 케이크의 이름을 물었을 때 궁정 요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L’e’l pan del Toni! 그것은 토니의 빵입니다”


그 후 그 빵 이름을 빠네또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은 실수로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그 실수는 하나의 경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빵이 되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조카 원이가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왔다.

대학을 가는 대신 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원이는 이제 겨우 22살이다. 하지만 원이는 남들이 다 갈 때 대학을 가지 못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 취직을 하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제 새로운 걸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까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원이가 해외여행을 결심한 건 친한 친구 때문이었다.


원이와 초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선이는 공부를 꽤 잘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부터 체육선생님이 꿈이었던 선이는 결국 원하는 체육교육학과에 입학까지 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엄친아인 선이는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터키, 영국, 일본 등을 여행하고 다녔다. 그런 친구의 모습이 꽤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원아, 친구랑 같이 이탈리아로 와. 밀라노에 오면 이모가 재워줄게!”


그렇게 두 친구는 겨울에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고, 여행 경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람이가 합류했다.

람이 역시 같은 동네, 같은 초, 중학교를 나온 친구로 조카 원이와 같은 고등학교까지 다닌 불알친구다. 그 친구는 용접 관련 산업체에서 일을 하다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형과 누나, 그리고 쌍둥이 누나까지. 네 자녀 중 막내인 람이는 언제나 엄마의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말도 없이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어 람이에게 내밀었단다. 여행을 다니며 세상을 배워보라고.

처음엔 겨우 일주일 동안의 일정이었는데, 혼자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한 달이 넘게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람이를 이탈리아 여행에 합류시킨 건 그의 엄마였다. 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정신을 좀 차리고 오라고 했다나....


람이는 친구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혼자 유럽 여행을 더 하겠다며 스위스행 기차표를 끊었다. 영어도 못하는 아이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체코까지 찍고 갈 계획을 세웠다는데…. 출발 하루 전날에 겨우 기차표를 예약했지만 그 아이의 표정은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뭐, 이렇게 고생도 해보고, 길도 잃어 보는 거죠.”


이렇게 덤덤하게 말하는 람이를 보니, 람이의 엄마는 괜한 걱정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3명이었는데, 갑자기 한 명이 더 늘었다.

마지막에 여행에 합류한 진이는 말도 별로 없고, 조용히 앉아 있지만 아이브를 좋아하는 빠돌이였다. 내 딸아이가 아이브 노래를 부르면 옆에서 씨익 웃으며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진이는 올해 수능을 다시 봐서 추가합격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떨어지면 군대에 가려고 계획 중이라고 했다.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해서 웹툰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자신이 없어서 온라인에 그림을 올리지는 못한다고 한다.



정말 오랜만에 각자의 고민을 가진 네 명의 청년들과 빠네또네를 뜯어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하는 대학교와 학과에 갔지만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아이, 내년이면 산업체 기간이 끝나 새로운 진로를 정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인 아이, 이런저런 방황을 많이 해 부모님이 걱정하는 아이, 하고 싶은 일과 가야 할 대학, 그리고 군대 문제로 마음이 심란한 아이.


이 네 아이들에게 이미 이십 대를 넘어 삼십 대를 거쳐 사십 대를 살고 있는 나와 남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MZ 세대라는 커다란 울타리에 아이들을 넣어두고, 요즘 아이들은 생각도 없고, 고생도 모르고 그저 즐길거리만 찾는다고 재단했던 나의 편견이 떠올랐다. 각자의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무엇이 진짜 행복이고 삶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나는 겨우 입을 열였다.



“이모는…. 간호학과를 나왔지만 지금 간호사가 아니야. 영어 공부는 겨우 38살에 시작했어. 글쓰기도 마흔이 다 되어서 시작해서 지금은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어. 너희들은 이모나 이모부보다 엄청 빠른 거야. 절대 늦은 나이가 아니야. 이모 생각에 실패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실패했다는 생각만 있는 거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인 거야. 대학에 떨어진 경험, 방황한 경험, 내가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여러 길을 가보는 경험. 영어공부 지금 시작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이모부도 27살에 영어공부 시작해서 지금 해외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잖아. 대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찾아봐. 돈을 벌고 일하는 건 어딜 가나 힘들어. 하지만 그 일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의미가 있거나 즐겁다면,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지.”



실패의 순간에 토니의 기지로 실패가 아닌 더욱 값진 경험이 되어 준 빠네또네 빵처럼,

이 네 명의 청년들이 지금의 고민을 넘어 각자의 경험을 쌓아 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평범한 네 명의 청년들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9박 10일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떠나는 한국의 20대 아이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소은아, 한국 오면 아이브 콘서트 보러 같이 가자~”

“지안아, 한국 오면 같이 축구하자!”

“이모님, 이모님 책 꼭 사서 읽고 블로그에 서평 남길게요~”

이런 귀여운 청년들 같으니라고!!



홀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떠난 람이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위스는 여기보다 많이 추울 텐데.... 물가도 너무 비싸서 뭘 사 먹기도 힘들 텐데.... 영어를 못하면 친구 사귀기도 힘들 텐데....


친이모처럼 걱정되었지만, 이 또한 그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걱정은 넣어두고,

아이의 건강과 안전을 빌었다.



작가의 이전글 9. 있는 그대로 긍정할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