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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24

11. 경청의 기술

긍정의 추임새 certo, esatto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새해를 함께 맞이하자며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10시만 되면 잠에 드는 아이들이 웬일인가 싶었다. 남편도 그런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 셋이서 거실에 모여 꽁냥 거렸다. 그런 가족들을 뒤로하고 나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몸은 천근이요 눈꺼풀은 만근처럼 느껴졌다.

 

2024년 0시에 맞춰 온 동네에 폭죽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아름답게 터지는 폭죽을 보며 아이들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에선 제야의 종소리를 함께 들으며 한 해를 시작하지만. 이곳 유럽에서는 폭죽을 터트리며 한 해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거실로, 베란다로, 내가 누워있는 안방으로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겨우 1초 차이로 어제와 오늘로 나뉘는 일이, 지난해와 새해로 나누는 일이, 그 시간에 몸과 마음을 쓰는 일들이 왜 이렇게도 부산스럽게 느껴지던지.

나는 얼마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나고, 남편과 대화를 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가도 눈물이 났다. 문제는 왜 눈물이 나는지 그 이유를 나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부지불식간에 감정의 바다가 일렁이다 역류하여 코끗을 찡하게 만든 후 눈까지 역류하여 기어코 흐르고 마는 것이다. 기침감기 끝에 달고 온 임파선염의 영향으로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한 몸때문일 수도, 연말이라는 시간의 영향일 수도, 이제 곧 한 살 더 먹는다는 세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 낸 변명은 “갱년기”였다.

자궁 수술 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낮에는 추워서 몸을 꽁꽁 싸매고, 밤엔 더워서 이불을 걷어 차고, 갑자기 올라오는 열기나 감정의 기복 역시 내가 갱년기에 접어들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의 가장 큰 위로이자 삶의 동역자인 언니들에게 이런 나의 상태를 전했다.

“갱년기 맞네. 그거 갱년기 증상이야.”

언니들의 말에 ‘나는 갱년기가 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선량아 지금 니네 형부가 엄청 힘든 상황이야. 가족들과 무슨 문제가 있고, 회사에서도 많이 힘들고, 건강도 안 좋고. 정말 힘든 환경인데 그걸 버티며 살고 있어. 너무 짠하면서도 또 대단해 보이고 그래. 이렇게 힘든 형부도 있으니, 너도 힘내라고 말하는 거야.”

언니의 메시지를 읽고 나를 생각하는 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그 말에 이렇게 답했다.


“타인의 힘듦을 나의 위안으로 삼지 않겠어!”




사람들은 대부분 힘들다고 말하면, 무엇 때문에 힘든지, 그 힘듦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그냥 무시하라고 하거나,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하거나, 너무 착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하는 식이다.

40년 넘도록 살면서 학습되어 이미 나의 세포 하나, 하나에 새겨진 ‘성향'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지 모른 채 하는 충고들이다.

또는 나는 너보다 더 힘든 상황이라고, 누구는 이렇게 힘든 데도 잘 버티고 있다고, 또 다른 누구는 몸이 너무 아파 가족이 모두 힘든 상황에 처했다고, 타인의 아픔을 가져다 놓는다. 세상 어디에도 비교는 존재하고,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진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비교를 버리지 못한다. 나의 힘듦이 이런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조언이나 충고, 비교는 사람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으로 작은 균열이 생기고 어느새 자기비하가 비집고 들어선다.

‘이런 작은 일에도 이렇게 힘들어하다니, 나는 왜 이모양일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경청이라고 한다. 경청이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과 그 내면에 깔려있는 동기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되돌려 말해주는 것을 말한다. 경청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의 이야기를 술술술 모두 말하게 된다. 특별한 해결책이나 방법을 제시해주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해져서 힘들었던 마음이 저절로 사그라든다.

경청을 잘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건 바로 추임새이다.

“아이고, 그래, 그렇지, 그랬구나, 당연하지, 정말 그래, 니 말이 맞아, 힘들었겠다….”

이런 추임새에는 충고나 조언, 비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기에 마음에 균열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 종종 경청의 기술을 목격한다.

“에자또 (esatto), 체르또(certo), 베네 (bene)~”

이런 말을 나열하며 긴긴 대화를 이어간다.

에자또와 체르또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래, 그렇지, 당연하지, 정확하지, 네 말이 맞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완벽하다는 말인 뻬르뻬또(perfetto)까지 더하면, “니 말이 다 맞아.”라고 할 수 있겠다.


경청의 기술은 나 역시 매우 배우고 싶은 기술이다.

자유 글쓰기 모임인 글월밤을 운영하고 있다. 월요일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 줌으로 만나 각자의 글을 쓰는 모임이다. 모임을 끝내기 30분 전에는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한다. 회원들이 글을 낭독하고 나면, 운영자인 내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거나, 감상평을 남긴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꼭 후회가 된다. 이런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조언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틈을 만드는 충고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죠, 그렇네요, 당연하죠. 힘드셨죠, 정말 그렇네요."

어찌 보면 주어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임새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겐 가장 위로가 되는 긍정의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자또, 체르또, 씨, 베네, 뻬르뻬또!"

누군가를 위해 긍정의 추임새를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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