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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Dec 21. 2023

9. 있는 그대로 긍정할 용기

[Fantastico]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주위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른 말은 잘 못 알아듣지만, 한 가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바로, ‘Fantastico, 판타스티코’다.


판타스틱(Fantastic)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적이지 않고, 꿈과 같이 환상적인 그리고 공상적인 상상 속의 세계를 표현하는 용어”로 우리말로는 ‘환상적인’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주로 너~~~ 무 좋아 죽을 것 같을 때, 비현실적인 상황일 때 “환상적이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 “Fantastico”라고 말한다.

그저 상대방이 예상외로 일을 잘했을 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계산이 딱 맞아떨어질 때, 내 아이가 그린 그림을 봤을 때 “판타스티코!”라고 말하며 경탄한다.

판타스티코는 부정적인 뉘앙스는 발 디딜 틈 없는, 모든 긍정의 표현을 에둘러하는 말인 것 같다.



판타스티코라는 말을 들으면 故 앙드레 김 선생님이 떠오른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어느 개그맨이 “아, 종말, 퐌톼스틱 해요.”라고 말하며 그의 흉내를 낼 정도로 ‘판타스틱’이라는 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 남성 패션 디자이너로서, 유명한 연예인들이 그의 패션쇼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두 남녀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포즈는 그의 패션쇼 피날레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김희선, 이병헌, 배용준, 장동건, 송혜교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그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앙드레김 추모 패션쇼, 2010.]


사실, 패션에 문외한인 나는 ‘앙드레 김’ 하면 떠오르는 것은 포마드를 발라 촘촘한 빗으로 빚어 넘겨 머리에 딱 달라붙은 듯한 헤어스타일과 어깨 뽕이 너무 심해 마치 날개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순백색의 재킷, 그 재킷과 한 쌍을 이룬 듯한 펑퍼짐한 승마 바지이다.

나에게 그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화려하게 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난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만든 옷이 특별하다고 하는데, 뭐가 특별한 건지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읽다가 내 정수를 내리치는 문장을 읽게 되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나도 사랑할 수 없다”





최근에 나는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밀라노에 살면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프랑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알아서 잘 크고, 나는 온라인으로 이런저런 일을 한다. 누가 봐도 멋진 삶이고 부러운 삶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나는 때때로 우울감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도, 친구에게도, 남편에게조차 내 우울의 상태를 말하지 못했다. 그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나의 우울을 잘 달래어 곁에 두었다.


이 우울의 이유가 ‘자궁절제수술’ 이후 일어난 호르몬의 불균형 때문인지, 소통의 단절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잠잠하게 흐르고 있던 내면의 한 조각인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나도 사랑할 수 없다”는 문장을 만나니, 내 우울의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건 바로 ‘내가 쓴 글을 사랑하지 못해서’였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었다. 참신한 소재와 위트 있는 문장이 반복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한계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잘도 조언을 하면서 정작 내 글 앞에선 한 발짝 나아가는 게 어려워 뒷걸음질 치는 글만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어떤 독자가 의리가 아닌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공감해주기나 할까?’


글 앞에서 절대 자기 비하를 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부정적인 마음은 점점 커져 아직 남아있던 긍정의 마음까지도 좀먹기 시작했다.




앙드레 김 선생님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연히 극장에서 오드리 햅번 주연의 <화니 페이스> 영화를 관람 후 패션에 매료되어 의상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의상 디자인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서 외국의 패션잡지를 구해 독학으로 공부를 했고, 1961년에 국제복장학원이 개설되자 1기 입학생이 되었다.

그의 패션에 대한 열정과 결과물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디자이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자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한 가수의 전속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당당함은 어디서 발현된 것일까?


앙드레 김 선생님이 김봉남이었던 시절, 아버지에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자가 만든 옷을 여자들이 입겠니?”


가족들조차 지지해주지 않았던 길을 가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애를 썼을까? 하지만 결국 열정과 집념으로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가 되어 50년 가까이 그 길을 걸었다. 그리고 한국 패션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전 세계에서 ‘최초’로 이집트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앞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그저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으로 화려하게 데뷔해서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일하며 화려한 삶을 살다 불꽃처럼 사라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의 마지막에 관한 기사를 접한 후 그건 내 오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폐암과 대장암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패션쇼 일정을 소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패션쇼를 마지막으로 2주 후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저절로 이루어진 삶이 아니라 열정이 고통을 이겨낸 삶이었다. 바로 그가 자주 말했던 “판타스틱”한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글쓰기 재능도 없고, 창의적인 사고도 없고, 새로운 소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더 글에 대한 열정을 붙잡아 보고 싶다.

조금만 잘해도 “Fantastico”라고 말해주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마음속 한 구석에 아직 남아있는 먼지 같은 긍정을 꺼내어 “Fantastico”라고 소리치면, 모든 부정적인 마음이 발 디딜 틈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지금의 내 글을 사랑하지 않는 작가는 미래의 글도 사랑할 수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벼운 긍정의 말, 판타스티코의 의미를 찾기 위해 검색해 보다가 우연히 읽게 된 故 앙드레 김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를 다시 쓰는 자리로 인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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