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심장과 나무감옥
어쩌면 티비를 보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무던하게, 그러나 그 하루를 쟁취하기 위해 심장을 태우며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습이 나에겐 너무 매섭다. 그들의 심장이 타는 그 열기가 너무 무섭다. 세상 속에 나무감옥을 만들어 진을 치고 있는 나는 타인이 내뿜는 열정이나 투지 따위의 감정들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티비는 현대 사회에서 빠지면 안 될 필수품이라고 생각된다. 태블릿 피씨가 보급되고 빔 프로젝터가 인기를 끌어도 티비는 여전히 집안 거실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꿰차고 잇다. 어린 시절에는 ‘바보상자’라고도 불렀던 티비는 빠르게 보급되면서 마을회관에만 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한 가정에서 2개 이상의 티비를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이렇게 쓰고 있는 나는 정작 티비가 없다. 내가 티비가 없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로 가장 큰 이유는 사용하지 않아서이다. 드라마, 예능, 영화 등 티비에서 의레 틀어주는 것들엔 학창 시절부터 별 관심이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노트북과 핸드폰으로 OTT를 이용하여 원하는 콘텐츠만 골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하는 콘텐츠’는 대부분 애니메이션으로 일종의 덕후인 나에게 티비는 그리 상성이 좋은 기계는 아니다. 그래도 1여 년 전까지는 드라마나 예능을 곧잘 보긴 했었다. 그때도 취향인 것 만 골라보긴 했지만 볼 수 있었고 재밌었고 또 다른 콘텐츠를 찾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째서 티비 혹은 그 안의 콘텐츠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감정소모’. 말 그대로 감정을 소모한다는 말이다. 연인과 싸우면서 똑같은 얘기를 반복할 때 많이 쓰던 말이다. 감정이란 것은 총량이 있다. 화를 낼 때는 화가 7, 그렇지 않은 다른 감정들이 3.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예전의 나는 우울과 무기력이 3, 예민함이 1 정도였던 사람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7년 차 조울증 환자이다.- 병의 차도가 나빠지면서 우울과 무기력이 5, 예민함이 2로 변한 것 같다. 그 감정들이란 것은 총량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소모가 되는 것일까? 우울, 무기력, 화,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의 양이 커지면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점점 새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감정의 총량에서 기쁨이 빠지고 환희가 빠지고 희열이 빠지고 설렘이 빠지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남아 버리는 것이 ‘감정소모’인 셈이다. 나의 감정에는 질투와 열등감이 가득해서 부잣집 연예인이 나오는 예능을 볼 수 없다. 또. 외로움으로 절절한 사랑이 그려진 드라마를 볼 수 없고, 두려움으로 폭행과 살인으로 점철된 영화는 보지 못한다.
제일 무서운 것은 일상이 그려진 놈들이다.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특이한 캐릭터도 나오지 않는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을 보면 나는 그들의 무던한 하루를 느낀다. 그와 동시에 그 하루를 위한 심장의 타오름을 느낀다. 그들은 심장을 태우며 움직이고 살아간다. 심장의 불길이란 매서운 것이라서 내 안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사람의 열정이나 노력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으로 드러나고는 한다. 살아 숨 쉰다는 것, 밥을 먹고 씻고 옷을 입고 지하철에 올라 회사를 가는 것. 그 모든 행위들이 열정이고 노력이다.
나는 자신을 ‘세상 속에 나무감옥을 만들어 진을 치고’ 있다고 표현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타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내 심장의 불 같은 것엔 아무 관심도 주지 않으며. 그들에게서 숨기 위해 감옥을 만들었다. 단지 그게 나무였을 뿐이었다. 나무 감옥은 끝까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내 심장을 불타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