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적인 묘사, 자살, 자해에 대한 민감한 언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컵의 가장자리에서 옆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에 대해 생각한다. 저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는다.
내 인생은 고통을 담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일 따위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물방울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사라질 것이다. 끝도 없는 죽음으로 날 내던질 것이다.
나의 자해는 하나의 흉터가 되어 나에게 한 겹의 또 다른 옷을 입힌다. 내 옷은 겹겹이 쌓여간다. 다시는 벗을 수 없을 만큼, 그 누구도 속살을 보지 못할만큼. 그 누구도 내 옷을 벗기고 싶어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사실은 옷안의 흉터들을 알면 모두 도망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산다. 내일이 와서 내일의 태양이 온다 해도 난 여전히 이곳에 누워있을 것이다. 병명이 없는 병을 앓는 나. 누구에게 기대어 울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 일어나고 싶어도 등이 붙어버린 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꿈꾸는 나.
마지막 잎새는 워낙 유명한 얘기라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마지막을 정해놓고 있으면 그 마지막이 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다. 아닌가?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난 항상 크리스마스 당일을 나의 마지막 순간으로 정해 왔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였는지는 모르겠다. 겨울의 차가움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함께 보낼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그 날에 행복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불쌍해서 일 지도 모른겠다. 크리스마스의 자살시도는 호텔을 혼자 잡고 욕조의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는 것으로 시작했다. 와인을 한 병 마시고 취기에 몸이 달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때가 되면 손목을 긋고는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자살을 이행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칼로 한두 번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깊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상처 - 그었던 것뿐이었다. 순간의 고통은 자살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매해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으로 끝났다.
이번에는 왜 3월 3일이었을까. 다들 물었다. 이번 자살시도의 트리거가 무었느냐 하고. 나는 그 전날 한 남자와 잤다. 예전의 내가 행해왔던 나를 망치는 방법 중 하나를 시행했던 것이다. 성추행을 당하기 전까지 난 수많은 남자와 잤다. 아는 사람이었을 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누군가 소개시켜준 처음 만난 사람이었을 때도 있었고, 어플에서 만난 남자일 때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직전의 애인을 사귄 뒤로 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왠지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날의 섹스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는 감정,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느끼게 했다. 내가 나를 망치게 놔두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참아왔던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그 순간의 익숙한 사랑놀이가 행복으로 느껴졌다. 나에겐 아주 쉬운 자해의 방법을 참아왔던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섹스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그날의 그것이 일종의 중독이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줬다.
전 해 크리스마스를 여전히 호텔에서 보냈다. 케익과 장미 한송이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새로 산 구두를 신었다. 와인을 한 잔 쯤 마셨을 때였을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것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엄마가 나를 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화기 너머의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오늘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둘 다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엄마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라고 했고, 나는 그길로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신나게 뱉어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속 아오마메가 된 기분이었다고 말이다. 비상구 계단을 올라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 비상구 계단을 내려왔을 때 떠있던 두 개의 달은 생경한 모습이었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마주한 한 개의 달은 현실에 돌아왔음에 안도할 수 있게 했다. 나의 세계도 새로운 곳이 된 느낌이었다. 두 개의 달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안일한 생각이었다. 아오마메가 고속도로 광고판의 호랑이가 원래 왼손이었는지 오른손이었는지는 기억해내지 못한 것처럼 나 또한 이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했다.
3월 3일의 나는 와인 두병과 독극물 한 병을 마셨고, 무의식의 나는 이성을 잃은 채 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나의 손으로 119에 신고를 했다. 그 후로 나의 고통은 컵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표면을 넘기지 못하고 있고, 아직도 그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노화와 병에 찌든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없을 수 도 있다. 언젠가 나는 그 물방울을 건드릴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물방울은 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