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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화 Jan 07. 2023

이야기가 영감처럼 찾아왔다!

[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01


2020년 여름 즈음, 이야기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는 방식에 대해 하는 다양한 묘사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그것이 나를 찾아왔다'라는 문장이다. 내가 직접 이야기를 떠올렸다기보다는, 무언가 더 큰 지혜, 그것을 신이든, 뮤즈 여신이든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여하튼 나보다 더 큰 어떤 존재가 이미 완성해놓은 이야기가 은혜롭게 나에게 베풀어지는 느낌에 가까웠다.








2019년 말, 21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사건이 일어났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당시 계약직이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약 5년간의 서울 생활을 청산했다. 대학과 짧은 사회경험으로 꾸려진 20대 초반의 보금자리, 낙성대의 자취방에서 짐을 전부 빼 아빠 차에 싣고 그대로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5년을 정리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물론 물리적인 부분에서만. 서울에 살면서 다양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났으며, 지식과 경험이 쌓였고, 틈만 나면 사색에 빠졌다. 그것들은 하루만으로 정리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것들을 정리하는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원래의 내 터전인 광주에는 명절마다 내려왔지만, 아예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낯설었다. 서울의 기억을 가지고 바라보니 광주의 한적함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그 한적함은 엄마 아빠로 인해 배가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새로운 취미로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그냥 작은 텃밭이 아니라 시골 한구석의 돌밭을 사서 두 개의 시설까지 지었다. 하나는 작은 집을 옮긴 듯한, 노란 장판의 평상까지 딸린 컨테이너 농막이었고, 다른 하나는 냉장고, 밥솥, 칠성사이다 간이 식탁과 의자, 농기구 등 잡다한 물품들을 넣고도 공간이 한참 남을 정도로 커다란 창고였다. 그 안에도 평상이 있어 밥을 먹거나 누워 쉴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창고라고 하기 애매했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규모였다.





광주로 이사한 뒤 그 텃밭을 처음 보았다. 그동안은 굳이 찾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텃밭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전화할 때 간간이 들었던 정보('우리 텃밭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있어~') 정도만 있었다. 쌈야채를 기르기 위해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부모님은 텃밭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고, 나는 슬슬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텃밭에 놀러 가보니, (부모님은 당신들이 몇 달에 걸쳐 공들여 가꾸어놓은 텃밭을 딸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하셨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곳은 노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님의 친가, 외가는 전부 농사를 지었다. 그 말인즉, 두 분은 어려서부터 한 사람이 하나의 인력으로 치환되던 농업에 익숙했다. 낫을 베기 어려우면 새참을 나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바로 그 시기, 바로 그 산업에. 한 번은 외할아버지 댁의 밭농사를 도와주었다. 당근인지, 감자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 심어있던 밭은 여러 고랑들이 늘어서 있었고, 나는 그 넓은 고랑을 왜 굳이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검은 비닐로 덮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랑들을 전부 비닐로 덮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집에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고랑 위에 비닐을 펼치고 흙을 몇 줌씩 올려 고정하는 업무를 하루 종일 반복했다. 밀짚모자 아래로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땀,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간간이 신발을 타고 올라오는 분수 모르는 벌레들... 일단 다 덮고 나니 마찬가지로 땀과 흙 범벅이 된 엄마아빠는 웃으면서 우리 세 남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내일 몸살 나겠다.





몸살이 날 일을 왜 자식들에게 시키냐고 물어보면, 농사란 절대적인 노동량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나는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알찬 노동이 끝난 후의 근육통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혹독한 PT를 받고 난 다음날의 기분 좋은 근육통 같다 할까. 여하튼 그날의 근육통이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음에도 텃밭 가꾸기에 대한 부모님의 애정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정도의 보람을 넘어선 농사일은 고된 노동에 가깝다. 낮에 직장도 다녀오시는 두 분이, 퇴근 후에 굳이 농사일을 하며 몸을 두 배로 혹사시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분은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에 가득 찬 채로, 몇 달을 내리 공들여 텃밭을 가꾸었다. 어쩌면, 나는 생각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닌을 통해 묘사했듯이, 땅에 붙어 농사를 하는 그 작업은 신성한 노동이 되어 삶의 영감과 의미, 그리고 보람을 가져다주는 걸까.





원래 그 밭은 돌밭이었다. 씨앗을 뿌려 열매를 거두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쉬운 길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 법. 부모님은 애초에 개간할 생각으로 그 밭을 샀다. 사실 돈이 없었다. 그리고 두 개의 큰 농막이 지어진 밭에, 심어진 식물도 하나 없었다. 그럼 전화할 때마다 텃밭에 있던 두 분은 무엇을 했냐. 바로 흙 밭의 돌을 골라내고 있었다. 돌을 골라내는 방식 또한 극히 단순했다. 어디서 방충망을 하나 뜯어와선 나무 틀에 박아 체를 만들었다. 그 안에 흙을 담고 몇 번 흔들면 돌이 걸러졌다. 돌처럼 뭉친 흙덩어리는 으깨었고, 돌에 진득이 붙어있는 흙들은 몇 번을 더 쳐대었다. 그러면 돌들이 걸러졌다. 체는 밥솥 뚜껑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정도 크기의 체를 들고, 부모님은 운동장 반 정도 면적의 밭을 수작업으로 개간하고 있었던 것이다. 쪼그려 앉아 체를 치고 있는 부모님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이 방법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꽤나 진지하고도 경건한 표정.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 온 정신을 쏟고 있으니 진지했고, 당신들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고 있으니 경건했다. 아, 어쩌면, 나는 생각했다, 저게 정말 안나 카레니나에서 묘사된 노동의 신성함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작업에 합류했다. 하다 보니 사람이 극도로 단순해지는 것이 기분이 퍽 괜찮았다. 돌이켜보면, 5년 동안 서울 생활을 하면서 흙을 만진 적이 거의 없었다. 굳이 만진 자연이라면, 길가의 나뭇잎이나 꽃잎 몇 개를 뚝뚝 따거나 스치듯 쓰다듬는 정도였다. 손톱 새로 박히는 모래들도, 점점 건조해지는 손마디도 거슬리지 않았다. 300개 정도의 돌을 걸러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 고랑도 끝내지 못했다는, 미션의 만만찮음도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처럼 자연과의 접촉과 단순한 노동에 몰입해가고 있었다.





딸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던 엄마는 나를 몇 번 만류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슬슬 즐거움이 붙었으므로, 나는 거침 없이 체를 흔들었다. 체는 두 개 뿐이었다. 빈손이 된 아빠는 내심 지겨운 작업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신이 났다. 엄마는 아빠가 노는 걸 탐탁찮아 했지만, 이번에는 딸이 아빠 몫의 노동을 대신해주고 있었으므로 별말 없었다. 엄마와 나는 몇 고랑을 사이에 두고 열심히 돌을 골라내었다. 간간이 대화가 오갔다. 엄마는 떨어진 5년 동안 딸이 서울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궁금해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5년간의 생활에 대한 단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간간이 오버와 유머를 섞으며 대답했다. 그새 아빠는 계곡으로 놀러 갔다. 단순노동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길 때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문득문득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매일 3000자 이상의 글을 쓸 정도로 글쓰기에 매진하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것 외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광주의 보금자리는 엄마아빠의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매우 안정적이고 평화로웠고, 한동안 부모님은 내 진로에 터치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글만 쓰면 되었다. 하지만 글 작업은 마음 편치만은 않았다. 나 스스로의 강박감, 마감에 대한 압박감, 그리고 완벽주의에 계속해서 시달려야 했다. 나는 초고 자체가 완벽하길 바랐으며(퇴고가 죽기보다 귀찮았다), 내가 써내야 할 수많은 분량의 글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불안에 자주 초조해지곤 하였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죽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 그것도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득그득 넘쳐흐르고 있는 그 시기에.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마감을 치루는 작가마냥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내달렸다. 하루치의 분량을 해치우면 그 이상 뿌듯할 수 없었으나, 당일의 글이 성에 차지 않거나 다음날이 되어 새로운 마감이 생기면 우울해졌다. 이러한 강박은 아마 내가 글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겠지. 나는 비통스러웠다. 일상의 순간순간 휴식을 취할 때에도 내 온 정신은 나의 글쓰기 작업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놓아버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강박이, 단순무식하게 돌을 걸러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흙에서 돌을 걸러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기반을 다지는 것처럼, 내 정신에서 압박, 강박, 완벽주의, 불안, 조급함 따위의 돌멩이들이 걸러져 순수한 영감이 싹틀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와중에 나는 또 생각했다, 그즈음 안나 카레니나를 너무 인상 깊게 읽었던 탓이다), 이 돌을 전부 걸러내 새로운 터전이 마련된 그 순간이면 내게도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엄마까지 체를 놓고 땀을 씻으러 들어갔지만 나는 여전히 흙을 걸러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아빠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지없이 삼겹살이었다. 세상의 모든 돼지를 잡아먹으려는 속셈인가, 농담을 떠올리면서도 노릇노릇 이어지는 냄새에 침이 고였다. 노동이 끝나면 식량의 보상이 있었다. 세상사가 어쩌면 그토록 단순하지 않을까. 그렇게 자유로운 상념에 빠져있던 차에 갑자기 툭, 이름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정말 툭 이라고 밖에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에서 내게로 떨어졌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흙을 쳐내었다. 돌들이 걸러질수록 더 많은 이름들이 떨어져 나왔다. 책상에 앉아 작업에 시달릴 때에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찾아오진 않았던 영감이, 단순한 노동의 경건함에 감격한 듯 흔쾌히, 그리고 꽤나 빈번히 찾아들었다. 돌멩이 30개에 영감 하나 정도의 비율로. 주인공 소녀의 이름, 소녀가 타고 온 말의 이름, 작품의 제목, 그들의 만남과 여행. 그리고 둘의 행로는 엇갈린다. 각각의 길에는 또다른 인물들이 있다. 그들이 이야기를 흐르게 할 것이고, 그들이 들고 있는 소품들도 하나씩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모든 인물들을 정확한 위치에 배치하자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의 돌 거르기 작업도 끝이 났다. 그 순간 이미 나는 영감에 흠뻑 잠겨 돌을 얼마나 많이 골랐는지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나는 귀하게 베풀어진 이름들을 잊지 않으려 용을 썼다. 폰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이름들이 나와의 채팅창에 논리 없이 적혔다. 영감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은 듯이 보일 정도로 무성의하고 거친 메모였으나, 사실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최선의 예우를 차리고 있었다. 삼겹살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엄마와 아빠가 그날 나의 노동에 대해 어떤 찬사를 보내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찬사를 받을 존재는 내가 아니었다. 영감이든, 뮤즈이든 내게 이야기를 던져준 존재, 그리고 그것이 찾아들 만한 계기와 환경을 한참 전부터 마련해둔 나의 부모님. 별 생각 없던 단순한 노동,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차근차근 완성될, 어쩌면 이미 완성되어 받아 적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그렇게 약 3년간 이어질 그림책 작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영감을 받으려면 단순하고 겸허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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