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03
조각조각 쓴 글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퇴고보다는 초고가 훨씬 재밌고 편한 나지만, 그리 길지 않은 그림책은 꾸역꾸역 퇴고를 해도 금방 끝났다. 퇴고 작업에는 끝이 없다지만, 이후의 퇴고는 그림의 분위기에 맞춰서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글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그런 내가 인체 비율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책은 아마 10년이 되어도 출판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내가 직접 배워서 그린다는 선택지를 저만치로 치워버리며, 나는 그림작가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전부 자기가 하려 말고, 이미 잘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현명한 경우들이 꽤 많다.
그런데 누구를 구하지? 내 주변에는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중학생 때만 해도 나는 덕후 기질을 가지고 갖가지 만화책을 파며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그런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었다. 한 명이 원피스를 좋아하면, 다른 애가 나루토를 좋아하고, 또다른 애는 데스노트를 좋아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고등학교 입시 시절과 대학시절을 거쳐, 사회생활의 문턱에 서게 된 우리들 중 아직까지도 즐거운 끄적거림을 취미로 남겨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극. 어쩌면 우리들 중 그림 쪽에서 나름 재능을 나타냈을지도 모르는 친구 한 명이 현실에 치여 붓을 놓게 된 것은 비극이다. 하지만 이 비극에 잠식된 나머지 내가 그림작가 구하기를 단념하는 것이야말로 더 비극일 터였다. 내가 받아 적은 이야기는 이런 사소한 문제 하나로 놓쳐버리기에는 잔상이 강한 편이었으므로.
나는 내 좁은 인연의 풀을 쥐어짜내어 그림을 그릴 뿐만 아니라 퍽 느낌 있게 그리는 사람 한 명을 떠올려냈다. 그 사람은 내가 서울에서 자취하던 시절, 자주 가던 단골 카페의 단골 손님이었다. 일주일에 4일 이상 출근도장을 찍을 정도로 자주 가던 단골 카페는 우리집에서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10평 남짓한 작은 개인 카페였지만, 음악 소리가 크지 않고 카페 사장님이 풍기는 분위기도 차분하여 작업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나는 가끔은 세수도 하지 않은 추레한 복장으로 카페로 가 작업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수를 하였고, 대개는 책을 읽기 위해, 가끔은 시험공부와 대학 과제를 하기 위해 카페의 한 켠을 굳건히 또 진득이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언젠가부터 눈에 띄게 자주 오가는 나에게 카페 사장님이 대화를 걸어왔다. 그렇게 사장님은 내가 자취하던 4년 간의 세월 동안 내가 겪은 우여곡절들을 거의 알게 되었다. 서로 보아온 세월만큼, 그리고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걸 즐겨 하는 성격만큼 사장님은 내 기분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내가 기분을 감추는 데에 능한 편이 아니기도 했다. 가끔 카페 한 켠에서 책을 읽는 척 떠오른 서러운 일들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면, 사장님은 쿠키 한 두개를 서비스로 주었다. 그 카페 공간은 나의 외로웠던 서울 생활의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처였고, 지금도 대학시절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향수(鄕愁)의 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토록 다정한 사장님에 차분한 공간이니 단골이 적지 않았다. 그 중 한 단골은 몇 번 오가며 얼굴을 익혔다. 간혹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주고 받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말을 트게 된 건 사장님이 우리를 서로 소개시켜 주면서부터였다. 그 분이 바로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다. 자세한 이력을 적을 수는 없지만 그림에 집중하고 싶어 오래 다니던 직장을 잠시 그만둔 상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종종 마주칠 때마다 카페 한 켠에서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던 것도 같았다. 카페 사장님께 카페의 풍경을 그려 선물하신 분이기도 했다. 짧은 대화 한 번에도 그림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났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나 프로필 사진에서마저도 주체할 수 없는 개성이 묻어 나왔다. 누가 봐도 예술가의 분위기를 풍겼다. 이러한 우연적이면서도 운명 같은 만남을 넘어서 내가 가장 꽂혔던 부분은, 이 작가님이 시인 랭보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림책 맨 앞장에 나는 랭보의 시 '영원'의 몇 구절을 인용했다. 원래는 랭보보다 랭보의 일생을 다룬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더 좋아했다. 레오 덕에 랭보라는 젊은 시인을 알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레오가 연기한 랭보의 매력에도 점차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내가 젊은 예술가의 천재성, 그것도 내 마음을 동하게 하는 류의 재능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재능을 수집하는 수집가처럼. 그래서 재능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 또한 높이 샀는데, 그러한 안목이 있는 그림작가라면 아마 이야기의 분위기를 살리는 그림을 그릴 줄 알 것이 분명했다. 안목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그 재능이 나와 함께 협업할 기회와 계기를 마련해준다면 그 이상 환상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나는 우리의 만남이, 그리고 내 주변에 그 분 외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마치 신기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단골카페의 사장님, 혹은 천재 시인 랭보가 이어준 인연으로 이미 그 분의 연락처는 내 핸드폰에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협업 제안 연락을 드리는 데에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나에 대한 확신보다도 이야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에 기대어 카톡을 드렸다. 금방 답장이 왔다. 우리는 바로 단골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이토록 순조롭게 그림 작가님을 구하게 되다니! 나는 하늘을 날다 못해 그대로 승천해버릴 것만 같았다. 놀라움이 지나쳐 황홀할 지경이었다.
우리의 운명적인 첫번째 회의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나의 상황을 먼저 풀어놓아야겠다. 광주에서 안식기를 취하며 원없이 글에 매진하던 나는 슬슬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다. 광주는 평화로움이 지나쳐 나의 성장을 촉진시킬 만한 사건을 찾기 힘들었다. 인구 수 때문인지, 네트워크의 양과 질 때문인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즈음 내가 쓰던 글의 주제가 '자유'였다는 것도 나의 지루함에 박차를 가했다. 이토록 안락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유에 대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글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서서히 풀이 죽어가던 내 안에서 문득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갖가지 사건들로 인한 심신의 피로를 다소 풀어냈으니, 또다른 모험을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다음 여행지로 택한 지역은 제주였다.
한참 제주 이주 열풍이 불고 있던 시기였다. 제주도로 가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 아닌가, 생각하면 할 말 없지만, 사실 개인의 직감만큼 남들에게 이성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자유'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과, 그림책 안에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인 산과 바다, 그 둘이 모두 있는 장소로서의 제주. 당시 자주 꾸었던 묘한 꿈들. 그 해에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갔던 장소. 내가 유독 좋아하던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도명 법도명(自島明 法島明)', 즉 자신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의지하라는 말씀 속의 '섬'이라는 표현 등. 여러 이유와 인상이 맞물려 내가 광주와 서울 다음으로 택한 다음 여행지가 제주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보였다.
물론 직관적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 이성적으로는 한없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의 직관을 신뢰하는 나마저도 제주로의 이주가 턱없이 공상적인 생각, 별별 허황된 이유를 갖다 붙인 현실도피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지 않은 적이 드물다. 실제로 제주로 이주한 후 2년 동안 줄곧 '내가 제주로 이주한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을까?'하는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주를 결심하던 당시의 나는 이런저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이니 실패를 극복할 힘 정도는 있다, 라는 낙관적인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의 결정을 엄마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약간의 서운함에 툴툴대었지만, 엄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런 말 할 줄 알고 있었어. 심심해 죽겠다는 티를 그렇게 내는데 금방이라도 다른 데 가겠구나 했지.'
어쩌면 이토록 무모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난 직후라서 그림작가님께 연락할 용기가 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로 이주한 후 한동안은 자리잡느라 정신이 없어 서울로 올라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나는 급히 서울행 버스표를 끊었다. 코로나가 한참이던 시기라 온라인으로 작업회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기념비적인 첫 협업 회의는 직접 얼굴과 눈을 마주보며 하고 싶었다. 제주로의 이주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나는 연락을 드린 다음날 바로 서울로 달려가야 했다. 두 발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말이다. 버스 안에서 나는 우리들이 완성할 그림책을 상상하다가 포기했다. 그 작가님도 워낙 자기만의 개성과 색채가 강해 나의 이야기와 그 분의 그림이 어떻게 어우러져서 어떤 그림책이 나올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첫 번째 미팅은 어렴풋한 긴장과 헤아림 속에서도 완벽히 순조로웠다. 일단 글을 읽어보고 결정하겠다고 답장을 했던 그림작가님은 내가 서울로 달려가는 사이 글을 다 읽은 상태였다. 글이 꽤 매력 있으며, 캐릭터의 개성이 강하니 나중에는 캐릭터별로 시리즈 이야기를 내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림책을 시리즈로까지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시리즈, 즉 연작의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면 모를까, 이미 한 편으로 충분히 완결 지어진 이야기를 굳이 나누어 연장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흔쾌히 협업 수락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개를 쉼 없이 끄덕였다. '그림책이 잘되면 연작이라고 왜 못 내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온정신은 그림작가님의 작업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나의 상황과 조건들을 솔직히 늘어놓았다. '제가 돈을 주고 그림작업을 요청할 정도의 자금이 있진 않아요. 그래서 인세를 5대 5로 나누는 협업 제안이에요. 그만큼 책임과 권한이 동등하게 나뉘어요. 저는 그림 스타일이나 분위기에 엄청 간섭하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방향성 정도는 같이 잡아야겠지만요. 장담할 수 있는 건, 저는 이 그림책을 꼭 출판할 거라서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을 거예요. 완성 기한도 그림작가님 일정에 맞춰서 조정할 거구요. 출판은 꼭 하겠지만, 1년 안에 꼭 출판해야한다, 기한을 설정해두지는 않았아요. 인생이 워낙 변수가 많잖아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떠보고 가늠해보며 주변을 아슬아슬 뱅뱅 돌던 대화는 그림작가님의 대답으로 곧장 정중앙으로 꽂혀들어갔다.
좋아요, 우리 같이 작업해봐요!
인연은 신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