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07
억제된 기대와 설렘 속에서 첫 번째 회의를 시작했다. 센터의 회의실은 제주의 오름이나 바닷가의 명칭이 붙었는데, 우리가 첫 번째 회의를 나눈 회의실의 이름은 거문오름이었다. 손톱만큼의 오해도 허락하지 않가 위해 나와 그림작가님(앞으로는 달밤님으로 표기하겠다)은 맞은편도 아닌, 바로 옆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내용은 그림책 전반의 톤과 분위기, 그리고 각 캐릭터들의 외양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 속에 한과 연, 담 등 각각의 캐릭터들은 그저 이름과, 이름이 암시하는 성격으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마치 안개에 가려진 듯 그들의 외양이 하나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림책의 분위기가 과거 유럽 동화책과 비슷하고, 신화와 상징이 듬뿍 담겨 있으므로 신비로움과 환상성이 부각되어야 한다 정도의 추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달밤님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때묻지 않은 특유의 순수함과 유머스러움이 있다. 그런데 가끔 작업에 대한 주관을 밝힐 때에만 나오는, 안경 너머로 치켜뜬 예리하고 단호한 눈빛이 있는데, 나는 그 둘의 차이에서 오는 매력을 매우 귀여워 한다. 여하튼 내 묘사를 들은 달밤님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달밤님은 막연한 안개를 돌파해나가려는 듯 캐릭터에 대해 하나하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의 성격은 어때요?"
"천진난만하고, 활동적이고, 누구보다도 큰 꿈을 가지고 있죠. 아이 같아요!"
"그럼 약간 꼬질꼬질하겠네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잘 씻지는 않은 어린애들처럼?"
약간의 호들갑을 섞어, 달밤님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한의 얼굴 윤곽을 스케치했고, 그 볼 주변으로 꼬질한 먼지를 묻혔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쳐다봤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한 캐릭터가 그려질 수 있다니! 그 동안은 5개월을 기다려도 그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었는데! 내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네! 맞아요! 그거에요! 좀 꼬질하면 좋겠어요. 대신 연은 완전히 깨끗해야 해요. 연꽃을 모티프 삼아 딴 이름이기도 하니까.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맑고 단정하게 피어나잖아요."
"그러면 연의 옷이 하야면 좋겠네요."
"네! 하얗고... 약간 펑퍼짐하고 하늘하늘하게... 바람을 머금은 느낌 있잖아요. 연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비로워야 해요. 바람처럼...!"
달밤님은 그때 그때 나의 요청에 따라 그림을 그려냈다. 가끔 연상되는 이미지가 없어 애를 먹을 때면, 아이패드로 참고할 만한 자료를 검색했다. 희고 펑퍼짐한 원피스, 연의 옷이 완성되었다.
"맨발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달밤님은 연의 발에 신발을 신기지 않으며 말했고, 나는 환희에 차서 손뼉을 쳤다.
"완벽해요! 그냥 달밤님 맘대로 그려요! 나는 최소한의 컨셉만 이야기할 테니, 나머지는 그냥 다 달밤님한테 맡길게요!"
"네? 뭐라고요?" 달밤님은 놀랐지만, 사실 그 뒤의 작업들은 전부 이렇게 진행되었다. 캐릭터의 필수적인 컨셉, 분위기, 각 장면들의 구도 정도만 내가 구상해서 달밤님께 가져다 드리면, 달밤님은 납득할 만하다고 여겨지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더 좋은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주었고, 달밤님의 의견은 거의 수용되었다.
"연의 머리색은 어떻게 할까요?" 달밤님이 물었다.
"한이랑 비슷하면서도 좀 대조되면 좋을 것 같은데... 금색과 은색처럼?" 내가 대답했다.
"은색이 좋겠어요. 신비로운 분위기가 훨씬 강해서."
"흠, 그런데 고민이 되네요. 한이 금발이면 조금 이상해요. 너무 고급진 왕자 느낌이잖아요. 한은 꼬질해야 하는데... 한국의 '철수', 독일의 '한스'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이미지가 강하면 좋겠어요. 갈색 머리가 딱인데..."
"저도 갈색이 좋은 것 같아요." 달밤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고민했다. "갈색 머리로 하고 금색 모자를 씌우는 것 어때요? 금색은 또 태양을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나는 더이상 신날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어무 좋죠! 완벽해요!" 그 뒤로도 나는 연신 '완벽'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달밤님과의 대화는 착착 맞물렸다.
"대신 금발인 캐릭터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갈라테이아로 하죠?"
"저도 방금 그 말 하려고 했어요! 갈라테이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나오듯이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해요. 무조건 예쁘게!"
"아, 예쁜 캐릭터는 그리기 어려운데..." 달밤님은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웃었다. 곤란한 요청을 받을 때마다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건 그림 작가님 특유의 버릇이었다. 나는 그 버릇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보았던 것 같다. 유독 어려운 장면을 그려야 하는 주간에는 훨씬 자주 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그 버릇이 귀엽고 웃겨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할 수 있어요!" 자기가 그릴 것도 아니면서 낙관적으로 말한 채 달밤님께 일을 넘겨버리면, 달밤님은 예상대로 훌륭하게 작업을 끝내고 왔다.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몇 번 더 주악거리며, 달밤님의 재능과 그 재능을 알아챈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워했다.
"조각가는 피그말리온과 동시에 신을 모티프로 삼은 인물이 맞아요. 장인 정신이 강해보이면 좋겠어요. 마치..." 나는 참고용 이미지로 가져온 삽화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달밤님을 바라봤다. "달밤님처럼요. 달밤님, 조각가 그릴 때엔 거울 보면서 그려요! 그냥 자화상 그리되 성별만 남자로 바꿔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될 듯요!"
"네?" 달밤님은 웃었고, 일주일 뒤 정말 자신을 완벽하게 닮은 캐릭터 시안을 보내왔다. 나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의 극단 생활과 달밤님의 전공 경력이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 경험들이 없었다면, 이토록 적절한 캐릭터들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 속에서 퐁퐁퐁 튀어오르던 캐릭터들은 그림작가님의 실력을 빌려 구체적인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와 구상으로만 존재하던 막연한 인물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마치 '말씀이 육화하였다'라는 성경 구절의 한 변용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강렬한 영감과 환희에 차서 작업된 캐릭터들이 일렬로 좌르륵 나열된 캐릭터 시안 파일을 받고 나자, 나는 더이상 한 치의 의심과 미심쩍음도 남겨둘 수 없었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아!
아니, 사실 '완전히' 달라!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번 협업은 모든 면에서 그 전 두 번의 협업과 달랐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정도도, 주기적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환경도. 기적 같은 인연이었다. 물론 달밤님만큼, 혹은 달밤님보다 실력 좋은 그림작가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 특유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달밤님이 유일했다. 다른 누구를 데려와도 아마 이 작가님보다 이 그림책에 적합한 사람, 내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그림책의 첫 장면, 한과 연이 서로를 처음 만나는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믿음을 넘어서 앎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그림책을 읽게 되는 누구라도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 대체불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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