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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Oct 17. 2020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덮여지네

단지 덮여졌을 뿐이지,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게 가능한가요? 라고 질문을 드렸거든요. 하림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내가 보고 있을 텐데,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게 아니라 덮이는 것 같아요. 한겹한겹 이렇게"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완전히 잊히진 않죠. 기억이 나겠죠. 하지만 저기 어딘가에 창고를 넣어눴고 문을 잠근 거죠" "그렇죠, 덮인 거죠" -유희열의 스케치북(202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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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참 착한 사람이야" 당산역 스타벅스,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 겨울의 발악처럼. 난 마지막으로 로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그를 잡기 위해 자존심을 굽힌 채 발악했다. 내 인생의 과도기를 함께한 사람, 주말마다 내 곁을 지켜줬던 사람, 방황했던 순간마다 우는 날 꼭 끌어안으며 나보다 날 더 잘 알았던 사람. 


홍콩 여행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나와 그는, 1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했고. 결국 이별했다. 취업을 하고, 처음 서울살이를 함께했던 그는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몰래 남겼던 블로그 글을 나 몰래 모두 읽고 있었다. 그렇게 한 겹, 한 겹. 나를 놓아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년 간 쌓아왔던 그와의 기억이 2달, 3달이 지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조금씩 잊히는가 했다. 생일날, 누가 봐도 새로운 여자 친구가 해준 생일 케이크를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음에도  화는 났지만 잊지 못하는 내가 참 미련했다. 하지만 어떨 땐,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생각도 안 나고 화 따위의 감정의 찌꺼기만 남은 듯했다. 


6개월이 지난 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했다. 어느 날, 그 날처럼 추운 공기가 물씬 풍겼던 날. 한 커피집에서 나와 그는 노트북으로 할 일을 하며 주말을 보내고 있었고, 옆자리엔 노란 머리의 여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반이나 가린 남자가 등장했다. 


여자는 자신이 사귀는 동안 잘못했던 것들을 나열했다. 사랑이라는 게, 사람이라는 게 다 뭘까. 얼핏 '붙잡는다'라는 이야기가 들리자, 과거 당산역 스타벅스에서 나와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보이는 듯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버린 스무디 앞에서 난 "오빠, 나 내가 하는 일에 꾸준히 할 거고. 더 좋은 데 갈 거야. 부산 내려가지 않고, 열심히 할게"라는 말에 "부산으로 내려가"라고 대답했던 그때가. "다시 오빠 만나고 싶어"라는 말에 "점점 싸우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다시 만나도 똑같을 것 같아"는 대답을 들었던 날. 


"더는 할 말 없지?"라는 오빠의 말에, "그래, 가자. 오빠 마스크 코까지 똑바로 써"라고 대답하며 찬 거리를 걸었던 날. 만나기 전, 오빠가 했던 "넌 글은 잘 쓰는데, 말은 못 하잖아"라는 말에 메모장에 가득 썼었던, 오빠를 붙잡기 위해 썼던 수많은 말들 중 단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는데. 


화이트데이라며 장미와 사탕이 곳곳에 꽂혀있는 편의점들을 지나, 오빠의 신발을 사려고 새 신발을 사지 못해 낡아빠진 내 신발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헤어지던 정류장에선, 그냥 배가 너무 고팠다. 집에 가서 미련하게, 하나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돈가스와 파스타를 우걱우걱 먹으며 눈물을 흘리며 점차 그의 부재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변했다. 외모도, 성격도, 가치관도. 그 카페에서 알았다.  나는 그를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묻고 있었다는 것을. 수많은 상황 속에서,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유희열의 말처럼, 기억을 창고에 넣어두고 자물쇠로 잠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문득문득 묻고 있었던 기억들이 새로운 사랑 그 틈 사이로 피어오를 때.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들 때, 지금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26살의 내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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