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튼 Dec 31. 2020

기억의 자물쇠를 풀다-영화, '먼 훗날 우리'

안 잊혀지던데요, 그 사랑.

잠 못 이뤄 뒤척일 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준 좋은 사람 생기더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 보여. 후회는 없는 걸.

먼 훗날 또다시 이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 그때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하림 'Whistle In A Maze'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를 부른 하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게 아니라, 덮이는 것 같아요. 한 겹 한 겹 이렇게"라고 말하며, 지금의 아내에게 살짝 미안한 감정을 표했다. 그러자 유희열은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완전히 잊히진 않죠. 기억이 나겠죠. 하지만 저기 어딘가에 창고를 넣어눴고 문을 잠근 거죠"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렇다. 우린 지난 모든 사랑을 녹슨 창고 안에 가둔 채, 애써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외면하며 살아간다. 영화 '먼 훗날 우리'는 가장 아플 때, 애석하게도 가장 놓치기 싫은 진한 사랑을 만난 린첸징(정백연)과 샤오샤오(주동우)를 그린다. 무채색 배경의 북경행 비행기에서 재회한 린첸징과 샤오샤오의 이야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 '먼 훗날 우리' 스틸컷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이 있듯, 샤오샤오 역시 "성공은 베이징에서"라는 일념으로 각종 궂은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 옆을 지키는 건 린첸징이었다. 돌고 돌아 사랑에 빠지며 같이 지내게 된 둘, 린첸징은 '이언'과 '켈리'가 등장하는 게임의 시나리오를 그린다. 린첸징은 "이언이 켈리를 끝내 못 찾으면, 세상이 온통 무채색이 되지"라고 말하며, 둘은 우여곡절이 없는 연애를 원한다.


영화 '먼 훗날 우리' 스틸컷


하지만 2009년 춘절부터 극의 공기가 반전된다. 시간이 흐르며 현실, 돈, 동창과의 비교, 고향, 부모님 등의 이야기가 등장하며 점점 작아지는 린첸징과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샤오샤오의 모습이 그려진다.


상황은 사람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너랑 있어 행복한 건데, 상황이 우리를 버려놓는다. 눈앞에 있는 너를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구질구질한 상황을 보게 만든다. 그 상황 안에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은 넌데, 현실에 집중할수록 상대의 존재는 당연해지고, 상처는 짙어진다.


그리고 우린 핑계를 댄다. "나와 있으면 이 사람이 불행하다", "내 상황에서는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놓아버린다. 여전히 사랑한 채로. 마치 지하철에서 샤오샤오를 붙잡지 못한 린첸징처럼 말이다. 이별의 상실감에 허덕이던 린첸징은 이언과 켈리 이야기로 게임을 개발해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 돈과 집을 얻은 그에겐 같이 있어야 할 샤오샤오가 없다.


영화 '라라랜드' 스틸컷


영화 '라라랜드' 역시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 함께 꿈을 그려왔는데, 꿈을 이룬 그 자리에는 "네가 없다".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스톤) 결국 서로가 없는 채로 각자의 목표를 이뤄 재회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서울에 갓 상경했을 당시 지금은 곁에 없는 남자 친구와 단 5만 원이 담긴 체크카드를 들고 영등포역을 거닐었던 그때,  수많은 커플들이 연말을 맞아 양고기 집을 서성거릴 때, 우린 저렴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먹으면서 잔고를 넘길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게 너무 서러워서 결국 집에 가는 길 눈물을 한바탕 쏟고 말았다. 신발가게에서 신어만 보고 머쓱하게 나올 때, 쿨하게 기념일 선물로 사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싫어서 적금을 깼다. 내 신발도 많이 낡았으면서. 그 땐 사랑하는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더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영화 '먼 훗날 우리' 스틸컷


많이 힘들었던 당시 난 블로그 글을 썼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빠는 속상함이 가득 담긴 내 블로그 글을 매일 읽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예민해져 자주 다퉜던 시기에 이별했다. 사실 난, 그때 놓친 사람에게 영화 갈무리에 등장하는 "미안해, 아직 많이 사랑해"라는 말을 하며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놓아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 옆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유를 가진 지금은, 그때의 남자 친구가 없다. 좋은 걸 누리며 행복할 때, 코 끝이 시큰거리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다.


결말은 "이별은 오롯이 그곳에 머물고 있을 때 가장 아릅답다"라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과거를 사무치게 그립게 만들어버린다. 마치,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이. 하지만, 잊고 있었던 그런 기억과 추억 하나쯤 있는 우리를 "그 시간, 잘 견뎌왔습니다"라고 위로한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영화 '먼 훗날 우리' 스틸컷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린 첸징과 샤오샤오와 같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할 수 없는 연인들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러니까, '먼 훗날 우리'를 보며 각자의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를 겪는 당신의 곁을 지켜주는 그 사람을 꼭 놓치지 않길 바란다.


더 해주지 못해 속상할 때마다, 말없이 내 귀에 가장 좋아하는 래퍼의 노래를 꽂아줬던 그때를 회고하며


작가의 이전글 신호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