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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un 20. 2021

택배 상자, 그 안에 고이 싸여있는 것

미안해요, 당신을 놓쳤어요

퇴근길, 여느 때와 같이 집 앞에 주차되어있던 택배차를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조금 더 안쪽으로 걸었던 나는, 그 택배차 안에서 택배원 아저씨가 아닌 그의 아내를 마주쳤다. 아무런 옷을 입지 않고 오로지 목장갑만 차고 있었던 그녀는 남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딸과 함께 택배 배달했던 리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선 뒤, 우리 집 문 앞에 놓인 택배 한 상자를 집으로 들여놓았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다음  출근길, 성수역에 내려 카카오톡을 켰다. 매번 보는 뉴스 속에서, 믿을  없는 헤드라인을 발견하고 클릭을 눌렀다.  이야기는  고향인 부산에서 일어난 택배기사 사망사건이었다. 60 기사가 자신의 택배차가 내리막길에서 내려오자 직접 몸으로 막으려다가 숨진 사건이었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어떠한 연유로 그러한 선택을 했을지 짐작할 수는 없다. 자신이 배달할 택배 상자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 혹은 내려가는 차를 막지 않으면 견뎌야   다른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허나, 짐작할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지켜야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생각했다. 우리는 아내와 함께 같이 일을 했던 분과 자신의 몸으로 택배차를 막으려고 했던 기사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택배기사가 겪는 불합리한 일들’이 다각도로 조명한다. 건축회사에서 잘린 리키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택배기사 일을 선택하는 모습. 아내의 차를 팔아 자신의 택배차를 마련하고, 시작한 택배 일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것이라는 벅찬 모습을 시작으로 점차 가족과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잔인하게 그려낸다.


요양보호사였던 아내 애비는 자신의 차를 팔았기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했고,  과정에서 추가 근무 시간이 생겼지만 회사로부터 정당한 돈을 지급받지 못한다. 동시에 리키 역시 하루 14시간,  6일을 일해야 했고 휴가를 갖기 위해서는 대체 기사를 구하거나, 하루 분량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피곤에 지쳐 쓰러진 부모의 TV 꺼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사람은 그들의 딸이었고, 가족 간의 대화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설상가상 아들 셉은 물류 배달로 제시간에 오지 못한 리키로 인해 정학 처분을 당하고, 자신을 이해해주던 친구가 동네를 떠나며 더욱더 엇나가기 시작한다. 리키는 상사에게 단 4일 만이라도 휴가를 원한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내 돌아오는 말은 그런 잔혹함을 먹고 자라는 게 바로 자신이라고 이야기하며 "당신과 같은 사람이 네 명이나 더 있었다"라고 말한다. 한 명은 엄마가 죽었고, 한 명은 딸이 자살했다고 일일이 읊으며 당신의 가정을 위해 회사에서 편의를 봐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4일 동안 돈을 지불하고 휴가를 가지라는 말에 이내 리키는 포기하고, 택배 일을 다시 시작하지만 차 안에서 소변을 보고 페트병의 뚜껑을 닫는 순간 강도로 인해 폭력을 당하고 물품을 모조리 갈취당한다. 강도들은 자신의 코뼈를 부러뜨린 리키의 상처 투성이인 얼굴에 그가 넣어두었던 소변 용기를 얼굴에 부어버린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눈을 뜰 수도 없는 리키는 병원으로 향하지만 회사는 무성의한 전화 한 통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의 처지와 상태는 안중에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물품 배상'을 위해 리키가 회사 측으로부터 지급해야 하는 돈의 액수만 부를 뿐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참다못한 리키의 아내는 욕설을 뱉으며, 병원 내에서 그들이 당한 불합리함을 소리친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병원 안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비춘다. 아비와 같은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부터, 화상을 입은 듯한 소방관, 셰프 복을 입은 요리사 등. 비단 택배 기사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인권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듯한 연출로 마무리된다.


영국에서는 택배 수령자가 부재중일 때 'sorry, we missed you'라는 카드를 넣어놓곤 하는데, 이 영화의 원제와도 일치한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라는 문구에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고 성치 못한 몸으로 다음 날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택배차를 운전하는 리키의 모습이 길게 비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초등학교 시절, 이 연필 한 자루와 커피 한 모금을 위해 먼 나라에서 무단으로 착취되고 있는 노동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들의 잔인한 혹사의 현장이 아닌 단지 연필 한 자루와 원두 한 팩이었다. 택배 상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해서 주문한 물건이 오려면, 당연하게도 택배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고 이 상자는 무조건 하루, 이틀 뒤에 나에게 도착해야 한다.


이틀 뒤 나에게 도착한 상자를 그저 테이프를 박박 뜯어, 열어보고 손과 몸에 착용해보고, 뿌려보고, 먹어보고, 집 안에 두어보고 그렇게 하고 나면 찌그러진 택배 상자는 그저 종이 분리수거함에 버려진다. 나는 그 택배 상자를 보고,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택배는 나에게 수단에 불과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택배가 늦으면, 기사 아저씨가  막힌 대교에서 열심히 오고 있다는 생각이 아닌 '배송 조회' 클릭하며  늦는지만 따졌다. 시간 내에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흔한 회사의 '로켓 배송', '당일배송' 문구를 선호했다. 얼마 , 회사에서 급하게 우체국 택배를 이용한  파업으로 인해 배송이 지연될 , "선배, 택배 파업했데요, "라고 말했지,  그들이 파업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연필과 커피처럼  과정은 나에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미디어와 기사  줄로 보이지 않은 많은 일들이 택배 상자 안에 고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있을 것이다. 기사님들의 보이지 않는 삶, 불합리한 노동환경과 페이, 존중받지 못하는 인권. 이제, 평소와는 다른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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