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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맨션 May 04. 2022

행복의 감각

감각의 조각집 - 04

    행복의 감각 - 복점을 어루만지며


    죽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아이였습니다. 11살 때, 악몽을 꾸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빨간 마스크를 쓴 여성의 스티커가 모든 버튼에 붙어있었습니다. 그 당시 빨간 마스트 괴담은 대부분의 어린이를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저도 그 어린이 중 한 명이었고요. 그 꿈을 꾼 후, 저승사자가 당장이라도 저를 잡아갈 거라는 망상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하고 기이한 생각회로였습니다. 대략 1년 정도 온갖 미신을 창조하고 믿으며 죽기 싫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중 기억나는 행위는 매일 밤 작은 수첩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라고 적는 것이었습니다. 적지 못 하는 날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발생할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살았습니다. 내일은 저승사자가 올까? 한 달 뒤에는? 일 년 뒤에는? 

 그 당시를 기억하는 동생이 ‘그때 언니는 좀 미쳤던 거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불안에 잠식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쫓겼습니다. 어린 저도 어렴풋이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인은 없고, 그저 제 마음에 기인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엄마, 난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워.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래서 웃을 수가 없어. 그런데 엄마,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아" 



     엄마와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녀에게 두서없는 문장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엄마는 나의 등에 있는 큰 점 (복점)을 어루만지며 ‘이 복점이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했습니다. 뿌연 안개가 갑자기 걷히는, 영화 속에서 보던 장면이 제 인생에서 재생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평생 안고 가야 할 줄 알았던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생각회로를 껴안은 채 살아갑니다. 


     어릴 적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아이는 커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외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하더니 살아있으니 행복을 바랍니다. 이런. 교실 창살을 보며 발붙이고 있는 공간이 감옥같다고 생각한 16살 저는 20대가 되면 행복할 거라 믿었습니다. 20살만 되면 자유와 행복이 감싸 안아줄 것만 같았습니다. 16살의 꿈과는 달리 저는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늘 어떤 불행이 불쑥 튀어나와 저를 괴롭힐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늘 숨기 급급합니다. 마치 11살의 저처럼요. 그런데 저의 불행은 너무 사소해서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저의 불행은 이러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나 싫어했던 친구의 소식을 접했을 때, 심사숙고해서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맛이 없을 때 (이건 너무 사소하네요) 등등. 여하튼 불행을 마주칠까 두려워 사람을 ‘자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혼자있는 건 싫어합니다)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꽁꽁 싸매느라 에너지가 꽤 소비됩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할 때면, 몸이 자라 더 커진 저의 복점을 힐끗 봅니다. 저의 복점을 보며 속으로 저에게 말합니다.


   '내가 불행할까 봐 너무 겁나. 내일 갑자기 불행한 일이 나를 덮칠 수 있으니까 마음 놓고 행복할 수 없어. 그런데 나는 정말 행복해지고 싶어'



     수많은 책들에서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마음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르게 가지기 위해 새벽마다 전날 행복했던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합니다. 어린 날의 저처럼 수첩에 막연하게 소원을 적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저의 행복은 이러합니다. ‘읽고 싶은 책을 당일 배송으로 주문했다’ , ‘동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반려묘가 나의 무릎에 누워 나를 쳐다봤다’ ‘출근길에 타는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마주하는 햇볕이 좋다’ ‘애인과 귤을 사러 밤마실을 나섰다’ 불행이 사소한 만큼 행복도 소소합니다.

 전 여전히 예상치 못한 불행이 찾아올까 봐 핸드폰을 멀리합니다. 그리고 모든 메신저의 알람을 꺼놓았습니다. (요즘은 SNS로도 불행이 날아옵니다.) 언제쯤이면 사소한 불행에 유연해지고 행복들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오랜 동네 친구에게 행복하고 싶다는 얘기하면 지겹다는 듯 ‘야 너는 고등학생 때도 똑같이 말했어. 처음 말하는 것처럼 굴지 마’라고 합니다. 10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건 10년 뒤에도 오지 않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합니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듯이요. 오늘도 저는 사라지지 않을 저의 복점을 스스로 어루만집니다. 어제보다 나아질 삶을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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