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세를 바로잡다

by 김삶

라스베가스에서 산호세로 가는 WN1341 6번열 E번 좌석에서 쓴다. 마지막 아침일기가 16일이었으니 8일 동안 한 자도 쓰지 못했다. 16일 토요일 저녁에 덴버를 거쳐서 올랜도로 갔다. 덴버에서 차를 빌려서 여행한 다음 탐파에 반납했다. 탐파에서 뉴욕까지는 직항이었다. 어제 새벽 뉴욕에서 누나, 어머니와 인사하고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 내렸다. 11일 가족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타코마에서 유유자적하며 여독을 풀었다. 어제와 그제 하루 3만보 넘게 걸었다. 가족을 만나서 힘받았고 여행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었다. 미국생활 중반기를 맞아 태세를 바로잡는다. 꼭 태세를 바로잡는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하루키가 <먼 북소리>에서 다짐했듯 나도 남은 미국생활을 보람있고 알차게 보내기 위해 태세를 바로잡는다. 태세를 바로잡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 쓰기다.

라스베가스 하늘에서 내려다 보다. 미국생활 중반부를 맞아 나는 태도와 자세를 바로잡겠다고 결심했다. (촬영: 김삶)

새벽에 시애틀에서 산호세로 가는 비행기가 연발한다는 문자를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획대로라면 7시 30분쯤 산호세 공항에 내려 사무실까지 가는 전철을 타야 했다. 9시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5시 30분 비행기가 10시에 출발한다니 잠시 멍했다. 잠이 확 달아났고 나는 태세를 바로잡아야 했다. 휴대폰을 들고 사우스웨스트 항공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내 비행기가 연발됐다. 나는 최대한 빨리 산호세에 가야 한다. 다른 비행편을 알아봐줄 수 있나?” 상담원의 제안은 내가 검색한 결과와 같았다. LAS로 가서 비행기를 갈아탄 다음 SJC로 가는 방법이다. 잠이 덜 깼는지 난 LAS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공항으로 생각했다. LAX와 구분하기 위해 S를 붙인 것으로 해석했다.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LAS가 라스베가스의 라스가 아닐까 추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적의 대안은 시애틀에서 라스베가스를 거쳐서 산호세로 가는 방법이었다. 경유시간은 1시간 남짓이고 이렇게 하면 10시 전에 산호세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2시간만 휴가를 올리면 되는 것이다. 상담원은 이메일로 변경된 항공권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결심이 서자 재빠르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존 항공편은 5시 반 출발이었지만 경유편은 5시 5분에 이륙한다. 30분 가량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서둘러야 한다. 눈을 뜬 시점은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때다. 씻고 짐을 싸서 3시 전에는 모텔6에서 나가야 한다. 미국에 와서 오랜만에 느끼는 압박감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사실상 죽어있는 게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 말이다. 모텔을 나간 시각은 3시 5분이다. 모텔6에서 공항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했다. 죽어라 걸었는데 전철과 연결되는 통로의 문이 닫혀 있었다.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이상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차로를 따라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터미널로 연결되는 자동차 대로변을 걸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운전자 입장에서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검색대를 통과해 탑승구에 도착하니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스레 라스베가스행 비행기를 탔다. 이제 2분 있으면 산호세 공항에 착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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