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술에 취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몇 자라도 써야 한다. 메타버스 세미나에 가느라 며칠은 아침일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뭐에 대해 쓸까? 내 감정과 상태에 대해 쓴다. 후배와 이야기하다가 루시드폴의 노래 <사람이었네>가 생각났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튼다. 아침일기를 노래가사로 갈음한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년. 방 안에 갇힌 열네살. 하루 1딸라를 버네. 난 푸른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땅.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늘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 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청년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루시드폴 3집 <국경의 밤> 대표곡 '사람이었네')
후배와 메타버스를 이야기하다 루시드폴의 <사람이었네>가 생각났다. 라디오 에디트 버전으로 가사를 필사하고 나서 8분 30초짜리 원곡을 들었다. 가사를 원곡으로 대체한다. 따뜻한 마음을 회복한다. 오랜만에 루시드폴 4집 노래를 들으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촉촉하다. 이걸 요즘 언어로 감성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겠지만 난 감성적이자 감정적인 사람의 길을 가겠다. 자본, 개발, 진보, 혁신... 이런 거대한 단어가 내 삶에서 구현되지 않을 때 얼마나 공허한 구호에 불과한지 매일 느끼고 있다. 아침일기는 자기혁명의 수단이다. 어쩌면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꾸준함 아닐까. 나는 감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