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왜 하필이면 파뿌리라고 했을까? 그냥 검은 머리 흰머리 될 때까지라고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백발을 하얀 파뿌리와 대비시킨 것은 우리 선현들의 멋진 비유다. 생각해보면 여자의 쪽진 머리가 파뿌리 하고 비슷하게 보이긴 하다.
현대인에게는 머리카락의 형태가 힘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삼손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사회 저명인사는 거의 염색을 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는 더 적극적이라고 한다. 다 이유가 있다. 전문가의 지적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의 흰머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 흰머리는 ‘로맨스그레이’라는 표현과 함께 점잖음과 경륜, 전문성의 상징인 반면에, 여성에게는 흰머리가 늙고 힘없고 자기 관리에 소홀하다는 표시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흰머리를 보고 ‘로맨스그레이’라고 말하는 것은 흘러간 옛이야기이다. 사오정, 오륙도가 판치는 세상에서 남자들도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해야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흰머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젊어 보이는 것은 중요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또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긴 하다.
말로만 듣던 그 파뿌리가 우리 집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새치 정도인데도 아내는 신경이 꽤 쓰였는지 시간만 나면 머리 다듬기를 했다. 아직 전체를 염색하기엔 이르고 흰머리를 그때그때 뽑자니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게 보이는 것이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에서 흰머리가 있다는 것은 고민거리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어느날,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딸 생일파티를 집에서 치른 적이 있었다. 집에 와보니 아내 얼굴이 부어있고 막내딸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내용을 알아본 즉, 딸 친구 중 한 명이 아내를 보고 ‘엄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라고 부르더라는 것이다. 젊은 엄마를 두고 있는 어린아이 눈에는 새치머리가 희끗거리면 할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막내딸이 “엄마, 걔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 엄마는 아직 많이 젊어보여”하면서 달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딸과 엄마의 역할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나이 많아 보이는 엄마는 학교에도 못 오게 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던데 말이다.
그 후 아내는 머리 색깔에 대해 더욱 신경을 썼다. 딸 친구들에게 젊게 보이기 위해서도 더욱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어찌 비켜갈 수 있겠는가.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해줬다. "당신은 새치머리가 있어도 동안이라서 젊어 보여. 아직 신경 안 써도 돼 “라고, 그렇게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대로 둬도 백발마녀는 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느 때는 직접 거울보고 뽑다가 딸내미를 꼬드겨 새치머리 제거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네 아빠가 속을 많이 상하게 해 흰머리가 늘었다" 그러다 애들 작업이 시원찮은지 이번엔 내게 부탁을 한다. 평소 잘해준 것도 없어서, 마지못해 아내의 새치 머리 제거 작업을 도와줬다.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치며 흰머리 찾아 뽑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것이 많아서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또 느낀 것은 가까이 있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잘 안 보이는 것이었다. 어째, 내 눈이 왜 이러지? 그러고 보니 이게 노안인 것 같다. 에구, 나도 노안이 온 것을 보니 다 된 모양이구나.
한편은 씁쓸하고 아내의 흰머리를 보니까 또 서글프다. 고집쟁이 처녀가 어느새 뚱뚱하고 새치 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니. 그니까 짝을 잘 만나야지. 처녀 총각이 만나 십수 년을 아웅다웅 살다 보니 벌써 이렇게 됐구나. 옛날 부부는 서로 이를 잡아주며 부부 협업을 했다는데, 우리는 서로 흰머리를 뽑아주며 그 정을 되새겨 볼까나? 깊어가는 가을밤, 아내의 흰머리를 뽑으면서 새삼 살아온 정을 되돌아본다.
십수 년 전에 쓴 글입니다. 이젠 머리 염색을 도와주면서, 새치 머리 있을 때가 호시절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