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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포 Feb 26. 2021

150년 전에는 '손 씻기'가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혁신 아이디어 수용단계 - 미쳤군, 미쳤군, 미쳤군, 당연하지!

첫 번째,  미쳤군

두 번째,  미쳤군

세 번째,  미쳤군

네 번째, 당연하지!

 하버드대학교 랜트 프리쳇(Lant Pritchett) 교수


첫 번째, 무시한다.

두 번째, 조롱한다.

세 번째, 공격한다.

네 번째, 당신의 승리

- 마하트마 간디


최고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능숙하게 그것을 실천하다.

중급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간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급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 노자 도덕경(41장)


기존 질서를 뒤집는 혁신적은 아이디어는 기존 질서를 흔들기 때문에 배척을 많이 받습니다. 지금은 손 씻기가 너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150년 전만 해도 '손 씻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19세기 중반 제멜바이스는 손 씻기를 주장하다 병원에서 쫓겨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다윈과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이론을 정립한 후에 발표를 몇십 년 간 미뤘습니다.


산욕열 발생과 제멜바이스의 손 씻기

제멜바이스는 1840년대 비엔나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했던 의사였습니다.  당시엔 산모가 출산 후 산욕열(childbed fever)로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산부인과 의사의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산욕열 발생건수가 산파의 도움으로 출산한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제멜바이스는 조사를 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의사들이 시체 해부를 하고 바로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도왔는데 그 과정에서 산모에게 뭔가를 오염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점입니다.


제멜바이스는 분만을 돕는 의사들에게 염소 살균 용액으로 먼저 손 씻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산욕열 발생건수를 10분의 1로 낮아졌습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병동 의사들에게 전면적인 손 씻기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주장을 한다고 병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계속해서 손 씻기를 주장하다 의학계의 배척을 받았고 결국 미친 사람 취급받아 정신 병동에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시신 해부한 손은 씻지도 않고 진료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닌 이런  만행이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루이 파스퇴르나 로베르트 코흐의 병원체 이론이 정립되기 전이어서 세균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손 씻기를 안 해서 저질은 그동안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서였습니다. 


다음은 관련 동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3AZ-BUyfqw&t=29s


제멜바이스 반사(Semmelweis Reflex)

이후 제멜바이스 반사란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제멜바이스 반사란 기존의 규범, 신념, 패러다임과 모순되기 때문에 새로운 증거나 지식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주장이 비록 옳더라고 말입니다.


제멜바이스는 죽은 후에야 그의 공로가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조국 헝가리에서는 제멜바이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최고 권위의 의과대학 이름을 제멜바이스 대학으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2008년엔 제멜바이스를 기념하는 50 유로 주화가 발행됐습니다.



<제멜바이스 기념 50유로 주화(2008년 발행)>




다윈과 코페르니쿠스

다윈은 진화론을 완성하고도 20년간이나 발표를 미뤘습니다. (비판 때문이 아니라  이론 정립에 따른 기간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30대에 완성하고도 비판과 비웃음이 두려워 30여 년 후에 지인의 권유에 힘입어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를 번복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찰스 다윈과 코페르니쿠스는 발표 후에 엄청난 비난과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아이작 뉴턴도 처음엔 주류 학자들의 공격에 시달릴 것을 생각해서 발표하길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뉴턴이 아카데미 좌장이 된 이후로 새로운 학설이 발표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 권위에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를 설득하고 깨닫게 한다고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결국 사망하기 때문에 입증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일수록 수용되기 어려운 이유는 기성층의 완고한 생각, 패러다임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큰 위기 뒤에 대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코로나가 한편으로는 대혁신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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