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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포 Jun 13. 2021

항우의 결정적인 패인

권토중래를 도모하지 않은 이유는?


항우와 유방의 천하 쟁패전은 워낙 유명해서 삼국지와 함께 자주 거론된다. 명문 귀족 출신인 항우가 초반에는 우세했으나 건달 출신 유방에게 졌다. 유방은 항우에게 모든 면에서 차이가 컸다. 가문과 신분이 천양지차였고, 개인의 품성과 자질면에서도 같이 놓고 언급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유방이 승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은 인재를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유방에게는 소하, 장량, 한신 같은 인재가 있었지만 항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범증이라는 대전략가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는 유방이 자신의 승리 원인으로 진단한 말로 <사기>에 기록돼있다.



항우는 ‘저 혼자 영웅’이었지만 유방은 유능한 인재와 지혜를 모두 모아 활용했다. 그 덕에 유방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이루었다. 유방이 부하들에게 “여하(如何 : 어떻게 하지?)”하면서 도움을 청했고, 반면에 항우는 “하여(何如 : 어떠냐?)” 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고 한다. 경청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는 예이다.



누가 말해도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직접적인 한방은 다른데 있다고 본다. 바로 초한 쟁패전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유방은 항우에게 휴전 협약을 제안했다. 항우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홍구(鴻溝)를 중심으로 천하를 둘로 나누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협약을 그대로 믿고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주요 장수들에게 임지로 떠나도록 하고 포로로 잡고 있었던 유방의 부친과 부인 여치도 돌려줬다. 


하지만 유방은 달랐다. 장량이 항우를 놓아주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로 유방을 설득하자 물러나는 항우의 뒤통수를 쳐서 사지로 몰아넣었다. 명백한 약속 위반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이 항우가 패한 원인으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거짓 약속으로 항우를 속여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결정적인 한방이었는데 말이다. 역사서에도 사면초가나 해하 전투만 나오고 약속위반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남을 속이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으로 나오지만 떳떳하지는 못해서 그랬을까?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이란 속이는 도(궤도:詭道)이다."


<해하전투 지리도 / 출처 : 나무 위키>


이렇게 생각하던 중 ‘용재 수필’에서 그 답을 찾았다. 용재 수필은 남송 시대 홍매(1123~1202)가 집필한 책이다. 흔히 에세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으로 사용한 사례가 바로 <용재 수필>이다.



그 ‘용재 수필’에 ‘장량의 후손이 없는 이유(張良無後)’란 글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량과 진평은 모두 한고조의 참모였지만 재주는 장량이 진평을 훨씬 능가했다. 진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속임수를 많이 썼다. 내 죄가 많으니 내 후손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진평의 집안은 증손에 이르러 죄를 받아 작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진평 보다 뛰어난 장량은 그가 죽은 쥐 겨우 10년 만에 작위를 박탈당했고, 이후의 후손은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했다. 장량은 어째서 진평보다 먼저 화를 당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략... 항우와 한왕이 천하를 나누기로 약속하고 병력을 철수해 팽성으로 돌아갔다. 장량은 항우를 놓아주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로 한왕을 설득했다. 그리고 군대를 돌려 항우를 쫓을 것을 권유했다. 결국 한왕은 항우의 군대를 섬멸했고 항우를 죽였다. 이러한 일은 항복한 적군을 죽이는 것보다 지나치니 장량의 후손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 홍매 지음, 용재 수필



이 구절을 읽고 무척 반가웠다. 900 여년 전에 홍매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이 글을 썼구나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수필에는 장량을 비판했지만 그 책략대로 움직인 유방에겐 더 큰 책임이 있으리라



유방은 천하통일을 이룩한 뒤 자신을 도왔던 장수들을 대거 숙청했다. 역사가들은 항우가 제패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항우는 자신의 능력이 이들보다 월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배신이란 걸 몰랐던 한신은 끝까지 유방에게 충성했지만 토사구팽 당했다.


유방은 배신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능글능글한 인간이었다. 유방은 ‘의(義)’를 앞세우긴 했지만, 의를 중요시한 것 이상으로 이(利)에 강한 사람이었다. 

- 사타케 야스히코 저, 유방



유방에게는 건달 특유의 세 가지 능력이 있었으니, 인내와 발뺌 그리고 불량스러움이 바로 그것이다.

- 이중텐 저, 품인록




항우는 왜 권토중래를 도모하지 않았을까? 

천하쟁패전에 나섰을 때 항우의 나이는 24살이었고 7년 후 31살에 해하에서 최후를 맞았다. 31살이면 너무 이른 나이다. 소년 영웅이었던 셈이었다. 그가 만약 40대에 그런 중책을 맡았다면 유방과의 경쟁에서 어떠했을까? 너무 일찍 성공했기 때문에 가져온 자만이 그를 파멸로 이끌지 않았을까? 인생 초반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한마디로 회복탄력성이 약했다.


반면에 유방은 항우보다 15년 위였으니까 연부역강한 40대였다. 연륜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나이다. 이중텐의 <품인록>에 의하면 유방의 천하통일 이후,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악독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만 늘어났다고 한다.


항우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한 번도 패배의 쓴잔을 맛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대패가 해하 전투였다. 항우가 포위망을 뚫고 오강에 이르렀을 때 부하 26명과 함께 있었고 강을 건너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항우는 "강동에서 함께 일어난 8천 장정들이 모두 죽었는데 무슨 낯으로 강동으로 돌아가겠나?"면서 승선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8년 투쟁하고 한번의 대패 후 모든 것을 포기했다. 반면에 삼국지의 유비는 23살에 기의하여 30여년간 무수한 고초를 겪은 후 59세에 비로소 한중왕이 됐다. 


많은 시인, 학자, 정치가들이 항우의 최후에 대해 논평을 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항우의 영웅적 기개와 절개를 배울 필요는 있지만, 자살은 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要學項羽的英雄氣節, 但不自殺, 要幹到底)고 말하기도 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제오강정(題烏江亭)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말은 이 시에서 유래됐고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에서 "어떤 일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힘을 쌓아 그 일에 재차 착수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제오강정(題烏江亭) / 두목(杜牧)


勝敗兵家事不期(승패병가사불기)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예측하기 어렵나니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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