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다산(茶山)은 강진 유배 시절 차가 많이 나는 산 이름을 따서 지은 호이고 남양주에 있는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그럼 여유당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다산은 직접 지은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도덕경에서 따온 것임을 밝혔다. 유학자 다산이 왜 도덕경에서 '여유당'을 가져왔을까?
도덕경 15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여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 (박석무의 번역)
여기서 앞 글자 두 자를 따서 여유당(與猶堂)으로 지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도덕경에는 與가 아닌 豫로 표기돼있다.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예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
예(豫)는 코끼리에서 비롯된 글자로 코끼리처럼 주저하고 머뭇거리다는 뜻으로, 유(猶)는 원숭이에서 나온 글자로 두려움이 많은 원숭이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뜻한다. 흔히 사용되는 유예(猶豫)는 여기서 연유된 말로 '망설여 일을 결행하지 아니함', '일을 결행하는 것을 미룸' 이란 뜻이다. 법률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산은 오랜 관리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800년 3월이었고 6월 정조대왕이 타계했다. 다산은 그동안의 생활을 반추하면서 여유당이란 당호를 지었다. 이 당호를 지은 두 달 후 다산은 옥에 갇혔고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다산의 나이 49세 때 일이다.
<남양주 정약용 생가 '여유당' 사진>
“겨울 냇가를 건너는 심정으로 조심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이 하겠다”
여유당기의 기록을 통해 취지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산은 왜 예(豫)를 여(與)로 사용했을까? 도덕경 원본에 따르면 예유당(豫猶堂)으로 사용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도올 김용옥의 해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예(豫)와 여(與)는 호환해서 사용되는 글자였다고 한다. 20세기에 발견된 도덕경 백서 을본에선 여아(與呵)로 표기돼있다. 또 다른 견해는 급류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猶’, ‘豫’, ‘與’로 표기했다는 주장으로 이 또한 호환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올은 예(豫)와 여(與)의 호환이 가능하다면, ‘예유’보다 ‘여유’가 발음하기 편하고, ‘여유’에는 우리말 ‘여유롭다’는 의미도 들어있어서 삶의 자세 속에서 여유를 찾으려 해서 그렇게 고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도덕경의 가르침과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연결해보면 충분히 공감한다. 여유당((與猶堂), 다산은 유학자였지만 당호를 공자의 논어에서 찾지 않고 노자의 도덕경에서 찾았다.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에 기존 유학사상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다. 17세기 유학자 윤휴는 천하의 이치는 주자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학자는 무릇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조선 유학자들은 노자 도덕경을 대놓고 인용하지도 못했다. 용감한 몇몇의 학자가 주해 몇 권을 남겼을 뿐이다.
다산의 주요 저술은 유배 기간 중에 지어진 것들이다. 생태학자 최재천은 "우리 옛날 학자들 중에는 유독 유배지에서 업적을 남긴 분들이 많다"면서 "만약 다산이 귀양 가지 않고 관리 생활을 했다면 과연 우리 역사의 최고의 역작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라고 말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 귀양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를 완성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 9년 귀양생활을 하면서 추사체를 완성했다. 한글 소설 <구운동>은 김만종이 유배지에서 쓴 글이다.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 집 여유당으로 돌아와서 18년간 말년까지 거주했다. 자신의 문집도 여유당집이란 이름으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