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했던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있다. “20대, 밥상 앞에서 반찬 투정하는 남자, 30대, 아침밥 달라는 남자, 40대, 외출할 때 어디 가냐고 묻는 남자, 50대, 아내가 야단칠 때 말대답을 하거나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남자, 60대, 퇴직금 어디 썼는지 물어보는 남자, 70대, 아내가 외출할 때 같이 나가자고 하는 남자.”
이젠 여기에 하나 추가돼야 할 것 같다. “요리도 못하는 남자.” 어쩌다 보니 ‘간 큰 남자’로 살아왔는데 이젠 변신해야겠다는 것을 실감했다. 언제까지 귀여운 행동을 할 줄 알았던 딸들도 성장하니까 요구하는 사항이 달라졌다. “왜 엄마만 밥을 해야 하는데? 아빠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이런 말에 대해서 할 말이 옹색하다.
일본에서는 은퇴를 앞둔 남성 직장인에게 앞치마와 칼을 선물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요리를 배워서 부부가 행복하게 지내라는 뜻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이런 일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요섹남’이 인기를 끈 지 오래됐고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은 온통 긍정 이미지다. “귀엽고, 괜찮으며, 근사하고, 섹시하고, 매력적이고, 새롭게 느껴진다.”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만 몇 년째 하고 있다가 올해는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유튜브를 통해 배울 수도 있지만 정식으로 수강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해서 지자체 학습센터를 검색했다. 한식, 일식, 중식, 동남아식, 지중해식 요리 등 프로그램들이 정말 다양했다. 특별한 요리 보다 자주 써먹을 수 있는 요리를 배우는 것이 낫다는 친구들의 조언도 들었다.
가까운 구립 학습센터의 ‘아빠 요리 교실’ 과정에 등록했다. 모두 12명인데 3명씩 4조로 편성해서 배운다. 남자 수강생들만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같은 조의 한 분은 벌써 1년째 다니고 있다. 칼질과 도구를 다루는 솜씨가 달랐다. 점점 요리가 재미있어서 계속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만들 때는 잘 모르겠는데 집에 가서 펼치면 별미더라"라는 설명도 했다.
확실히 실습 때 만든 요리를 집으로 가져가서 가족과 같이 먹는 즐거움이 있다. 강사의 훌륭한 레시피 탓인지 남다른 정성인지 모르지만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가족들의 환호와 격려가 이어진다. “드디어 아빠가 해준 요리를 먹게 되는구나.” “사진 찍어서 친구에게 자랑해야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 들어서는 머리보다는 손발 움직이는 일을 해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말이 있다. 머리로 일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 ‘퇴물’ 소리를 듣는데 손으로 일하는 사람은 ‘장인’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잔소리 보다 할머니의 손맛을 더 좋아한다. 손으로 하는 것 중에는 서예나 그림 그리기도 있지만 요리야말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니 일거양득이다. 더구나 밖으로만 돌았던 자신을 가정으로 복귀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밥은 한울님이다. 한 그릇을 잘 먹으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만사지(萬事知)를 얻을 수 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말이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의미가 자뭇 크다. 지금까지 차려준 밥상을 잘 받아왔으니 이제 밥상을 차려야 할 때가 되기도 했다. 요리를 통해서 만사지를 얻을 순 없어도 ‘간 큰 남자’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