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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Sep 30. 2024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기형도 <비가 2 - 붉은 달> 중


제 브런치북을 읽어 본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얘기했습니다.


"오빠, 그 옛날 얘기들을 어쩜 그렇게 기억해?"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어쩌자고 재미도 하나 없는 다 지난 그 옛날 옛적 일들을 여전히 품고 있을까요.



살다 보면 유독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이름 지으며 그리워하기도 하고 "후회"라는 그릇에 담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 회복되지 않은 아픔들도 흉터처럼 그 때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을 때만 해도 내 부모와 형제들이 무대 전면에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 나라의 4,50대 가장들이 엇비슷하게 겪는 보통의 스트레스쯤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죠.

먹고산다는 건 누구에게도 고단한 일이니까요.  


내 불안과 결핍의 기저에 어그러진 가족들과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그토록 뚜렷하게 남아있을지는 몰랐습니다.








명절 시즌이 되면 부모님을 각각 따로 찾아가 만났었는데 이번 추석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간의 모임이 끊긴 지는 이미 한참 전이고요.

어차피 엄마의 종교 때문에 명절이래 봐야 평소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이 살아와서,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 크게 어색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저와 아내와 아들이 모여 즐거운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부모님을 만나는 일이 반갑거나 애틋하지 않을 뿐 이니라 당신들의 안부조차 전혀 궁금하지 않게 됐습니다.

심지어 폰 화면에 이름이 뜨면 "또 뭐가 필요해서 전화하셨을까"라는 생각부터 떠오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거의 전부였구요.


그분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드리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와 같은 목적일 때만 기계적으로 저를 찾고 또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시름시름 지쳐갈 따름입니다.

사랑이나 존경, 혹은 일말의 측은함조차 사라지고 의무감만 남은 관계는 이렇게 메말라 갑니다.

 


그러나 엄마와 아버지에게 "왜?"라는 질문은 더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쌓여있는 질문들이 한가득이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 나한테? ..왜 내게만?..

이렇게 물어봐봐야 공허한 울림에 그칠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두 분의 기억 모두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된 채로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고 게다가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저와는 다르게 깨끗이 삭제돼 버려서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퍼즐을 맞추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사라진 기억을 되살릴 방법도 없고 달리 애써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누나들에게는 오래전에 SOS 신호를 보내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힘이 부치니 좀 나눠서 해달라고 말이죠.

별 말없이 듣고만 있던 첫째 누나와는 다르게 둘째 누나는 대번에 저에게 따지듯 묻더군요



그래서 네가 뭘 하는데 그래?



그것으로 협상은 결렬입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다른 집 아들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너만 유난이냐는 의민지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둘째 누나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가장 가까운 피붙이로 지내면서 서로가 처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대미지(damage)가 좀 있었습니다.








처음엔 낯설어도 살게 되면 또 살아집니다.

재작년 엄마가 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 모시고 가는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그은 적이 있어요.

전에도 몇 번 얘기했다가 흐지부지되곤 했는데 이제부터는 다를 겁니다.



앞으로 병원 가는 일로 누군가 동행이 필요하면
나머지 형제들한테 꼭 알릴 것.

그들 모두 돌아가면서 모시고 가게 하되
내 차례가 될 때만 나한테 연락할 것




엄마는 당황했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병원에 함께 간 형수가 꼼꼼히 자신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핸드폰이나 보고 있더라며 푸념하는 걸 봐서는 조금씩들 움직이고 있긴 하나 봅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나둘 익숙해질 겁니다.

직장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두 누나들도

인천에서 용인까지 전보다는 자주 다녀가던가 하겠죠.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다 합니다.



이제는 간단한 문진과 처방만 해도 될 상황이 됐음에도 꿋꿋이 대학병원만을 고집했던 아버지도 적당히 가까운 동네 내과 한 곳으로 잘 다니고 계십니다.


꼬박꼬박 아주대병원으로 다니던 시절, 식탐 많은 아버지는 공복에 마쳐야 할 혈액검사를 빨리 끝내고 밥을 드실 생각만으로 매번 가장 이른 타임에 진료 보기를 예약하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용인에 있는 형네 집 앞으로 가서 아버지를 태우고 수원의 아주대병원으로 이동하다 보면 항상 피크타임의 출근 시간대에 겹치고 도로 사정은 답답하기 일쑤였어요.



“ 아버지, 한 삼십 분 정도만 늦게 예약해요,
  요맘때가 차가 제일 막힐 땐데 ”


“ 늦게 가면 하루를 그냥 보내는 거 같아서 말이다 ”




삼십 분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냥 배가 고픈 거예요.

병원 지하 식당에 가서 빨리 식사를 하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회사에 반차나 연차를 쓰고 바쁠 때는 몇 번을 시계를 들여다보며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죠.


어느 날엔 검사를 마치고 맛있게 순부두찌개를 드시는 모습을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쥐고 있는 저 숟가락을 뺏어버리는 기괴한 상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제 마음의 병이 그렇게까지 깊어졌었습니다.









어쨌거나 세상 모든 부모가 다 위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가족이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닐 겁니다.


그들로부터 받은 고치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어도 그 위에 차곡차곡 따뜻한 무언가를 쌓아 올리다 보면 그 흉터들도 머지않은 날에 기억 저 너머로 흐릿해지고 이 잔혹한 부조리극도 막을 내리겠지요.












*Epilogue


그리하여

한결 청명해진 가을의 초입에,

재미없고 투박하며 불편하기 그지없는 저의 중얼거림은

이만 줄입니다.

주로 회사 업무 중에 짬짬이 연재를 이어가느라

바쁘고 매우 전투적인 9월이 되었지만

이 또한 값진 경험이라 여겨집니다.


아울러 더없이 부족한 글에 관심을 표해주신

구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소수의 분들이라 더욱 애틋한 마음입니다 ㅋ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펴주신 다른 모든 분들 또한

무언의 격려가 되어 힘을 얻었습니다.


두루두루 행복의 기운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용인시 일출의 명소, 석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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