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나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근원적인 질문이 몇 년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갈수록 엄마는 나에게 다양한 것들을 끊임없이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의무적, 희생적 관계라는 프레임 안에서 엄마는
늘 "갑"이었고 taker였다.
따져보면 그 관계의 기원은 나의 아동기로부터 출발한다.
사고가 채 정립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얼토당토않은 종교집단의 교리를 주입시키고 세뇌시켰다.
그것은 자녀의 삶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당신의 뜻대로 교화하지 않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체벌했고 비난을 일삼았다.
또한 자식들을 편가르고 유독 나에게만 이해와 인내를 요구했다.
장남이 밥상의 중심에서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을 때 여섯 살이나 어린 나에게는 과일을 깎아놓도록 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손이 더듬거리기라도 하면 엄마의 입에선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왔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능숙하게 과도를 다룰 줄 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끝없이 아버지를 욕하고 끝없이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나에게 주입시켰다.
무능력한 장남이 안겨준 상실감마저 나에게 쏟아부었다.
나는 엄마가 파놓은 굴 안에 갇혀서 미처 주변을 살피고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엄마 곁을 지키는 데에만 쩔쩔매야 했다
그러나 애초에 사이비 종교 따위에 현혹되어 집안을 흐트러 놓기 시작한 건 엄마다.
자식들에게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을 얹어준 책임에서도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힘들어하는 자식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 없이 종교 집단에 들어가 자신의 하나님만을 찾았다.
이제 서른 살 밖에 되지 않은 장남에게 집 안의 어른 노릇을 넘기고 책임을 방기 하며 나를 천덕꾸러기 취급한 건 비단 아버지뿐이 아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집을 나와 갖가지 부양의 책임을 오로지 나에게만 전가한 것도 엄마다.
하지만 엄마는 세월이 흘렀다는 핑계로 지나 온 흔적들을 부정하고 회피하며 거짓말로 스스로를 옹호한다.
이따금 엄마의 궤변에 다름 아닌 회상을 들어보면 세상 불쌍하고 가련한 운명의 주인공은 바로 엄마 자신이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희생했다고 말하며 과거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세뇌시키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옛날 막내인 내가 어리고 안쓰럽지만 않았다면 진작에 가정을 버리고 나갔을 거라는 대목에선 소름마저 돋았다.
이것이 내 엄마의 본모습이다.
엄마의 몰염치한 요구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늘어났고 틈틈이 아버지의 처지까지 살펴야 했던 나의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마
형도 있고 누나도 둘이나 있는데
나한테만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나눠서 해야 되는 게 맞잖아
엄마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형이 어딨고 누나가 어딨어
형제면 다 똑같은 거지
게다가 큰 누나는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니고
아들은 원래 그런 거야
형은 아들이 아닌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린 시절 형한테 그렇게 얻어맞고 지낼 때도 “형제는 다 똑같은 거”니까 동생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해줬으면 내가 얼마나 위로가 됐을까.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저런 병치례로 병원을 가야 할 때면 날짜와 시간은 조율이 아니라 통보가 되기도 했다.
"다음 주 3시에 병원 예약했어"
"나도 회사에서 일을 해야 되는데 평일 날 시간대를 이렇게 말도 없이 잡으면 어떡해?"
"난 네가 시간이 되는 줄 알았지"
도무지 병원을 모시고 갈 여건이 되지 않을 때 누나들 얘기를 꺼내면 항상 같은 대답들이 번갈아 돌아왔다.
"누나는 차가 없잖아"
"누나가 돈이 어딨니"
"누나 이번주에 일이 있어서 바쁘대"
엄마의 속마음이 점점 궁금해졌다.
엄마가 이렇게도 거리낌 없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이유는 뭘까
어려서는 장남을, 이제는 누나들을 감싸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런데 나는 왜 항상 그 무리에서 빠져있는 거지?
하지만 차근차근 속내를 들어보려고 하면 눈치 빠른 엄마는 이내 회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한테 그런 말 하지마
네가 그러면 밤새 한숨도 못 자
재작년 봄, 거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엄마의 허리뼈 일부가 골절되는 일이 있었다.
한동안은 보조기를 허리에 두르고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이었고 엄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까지 걸어 오가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두 번씩은 출근 전에 그 집에 들러 청소기를 돌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채워 놓으며 엄마의 상태를 돌봐야 했다.
하지만 오며 가며 아무리 둘러봐도 나 외의 누구 하나 왔다 간 흔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나들은 좀 안 온대? 형수는?"
"누나가 일하느라 바빠서 평일에 어떻게 오니.
형수도 낮에는 학원 가봐야 되고"
“엄마.. 나도 집에서 노는 사람 아냐.
여기 들렀다가 출근해야 돼“
그렇게 엄마의 허리뼈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총 6주 동안 내내 그 집을 오갔지만 누나나 형수가 와서 뭔가를 돕고 거들고 가는 일은 없었다.
이 밖에도 일일이 거론할 의미도 없는 똑 닮은 일들이 무수히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있었다.
솔직히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많은 것을 바라거나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일 년, 아니면 이삼년에 한번이라도 모두 모여 아무 생각없이 밥이나 먹고 혹시나 나눠져야 할 짐이 있다면 조금씩 거들면 그만이었다.
내 아이와 조카들이 "사촌"이라는 울타리 안에 모여 불편하지만 않게 어울리고 서로를 알아가기며 체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특출한 부자가 될 필요도 없었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럭저럭 메워가며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요원한 희망은 모두 부서졌으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병들어 있었다.
증상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건 적어도 3,4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일상의 중간중간에 과거의 상처받은 기억들이 예고도 없이, 삽시간에 의식을 잠식해 버리면 나는 마치 그때 그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생생히 고통받고 있는 듯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출근길 차 안에서도 바쁜 업무 중에서도 심지어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도 불쑥불쑥 그 기억들은 휘몰아쳤고 머릿속 공간에는 어김없이 나의 부모, 형제들이 등장했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숨이 차오르고 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빛 한줄기 없는 딱딱한 방 안에 나는 혼자 버려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노출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환경과 가난, 가정불화, 엄마가 강요한 종교 등은 어느새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저 아래서부터 나를 서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특히 엄마가 자행한 다양한 심리적인 지배와 가스라이팅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내 자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위축됐고 마치 착한 사람 콤플랙스에 갇혀 버린 듯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 의견, 감정을 주도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불필요하리만치 타인의 기분을 살피고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강박으로 다가와 마음을 지치게 했다.
더 망설이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살아야 했다.
생물학적 형을 삶에서 들어낼 때처럼 가장 먼저 엄마, 아버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시급했다.
언제가 될지 불투명하지만 내가 온전하게 바로 설 때까지 나는 그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 내가 이랬으면 더 나았을까, 후회하거나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해서 부모를 돌봤다.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듣고 싶었지만 끝내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은 내가 내 자신에게 해주고 따뜻하게 보듬을 참이다.
돌아보기도 숨 막히는 과거의 상처들을 이곳에 주저리주저리 꺼내놓은 이유도 결국은 나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디가 아팠고 어떤 상처로 남았었는지 천천히 살펴볼 계기가 필요했다..
결국 긴 세월에 걸쳐 가족의 일부가 해체되었지만 그렇다고 내 삶마저 붕괴된 것은 아니다.
나는 떨어져 나간 가족들로부터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겐 그들 말고도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