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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Sep 23. 2024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내려놓기


2017년의 어느 봄이었다.

평일 낮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통 우리의 통화는 자주 있지도 길지도 않았으며 아버지가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나에게 부탁하거나 요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자식 중 유일하게 그렇게라도 받아주는 나를 고맙게 여겼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번거롭고 귀찮고 마뜩지 않은 경우들이 많았다.




네가 좀 와봐야겠다. 병원엘 가야 될 거 같애




이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어디가 불편해요?"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지금 어딘데? 혼자 있어요?"

"집이야. 형이랑 형수랑 다 있어"



잠깐 숨을 돌려야 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지금 같이 집에 있는데 굳이 나에게 또 연락한 이유는 뭘까.

회사가 있는 서울에서 용인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은 더 걸릴 건데 말이다.



"아니 그럼, 나한테 전화할 게 아니라 누구한테던 말해서 빨리 병원부터 가셔야지. 저 회사에 있어요"

"내가 누구한테 말하니"



아 그거였구나.

한 집에서 살고 있을 뿐, 그들에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런 취급에 대해서도 별말없이 체념하듯 순응하고 있었던 거였다.



"알았어요. 일단 119 불러서 아주대 응급실로 데려달라고 하세요. 나도 출발할게"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아주대병원에서 당뇨, 고혈압, 심장질환 등을 치료받고 검진을 이어오고 있었다.










일단 큰 병원 얘기가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회사를 나오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넣었다.



"엄마. 아빠가 어디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집에다가 말도 못 하고 나한테 전화가 왔어. 

엄마가 형수한테라도 연락해서 일단 병원부터 보내라고 해줘"



엄마는 엄마대로 장남과 불편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형수와는 별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다. 마침 형수도 집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라도 알려서 병원 가는 걸 서두르는 게 낫지 않을까 했다.





내가 어떻게 전활하니
니 아빠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면서

두 누나들에게도 메시지를 남겼다.

둘째 누나는 내용을 보고도 무응답이었고

첫째 누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오늘 저녁에 일이 있는데











응급실은 언제나처럼 어수선했고 

오래지 않아 휠체어에 축 늘어진 채로 앉아있는 아버지를 찾아냈다.


"아 보호자님 오신 거예요? 잠깐만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옆으로 다가가기 무섭게 의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니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두셨대요?"



이 지경이라니?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아버지의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오른쪽 사타구니 쪽이 마치 풍선처럼, 핸드볼 공 만한 크기로 부어 있는 게 보였다.

혈관이 어지럽게 부풀어 드러난 그곳은 이미 시커멓게 괴사가 시작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의 신체 일부분이 그렇게까지 부어 오른 모습을 본 적이 없을만큼 기괴한 장면이었다.



"아버지, 이게 뭐야? 왜 이래요?"



진료를 본 의사도 얼떨결에 불려 온 나도,

우리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동네 병원에서 탈장 같다고 큰 병원엘 가라는 걸
괜찮을 줄 알고 진통제만 먹었더니 이렇게 됐다




의사는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응급실 내에서도 긴급한 환자들을 우선 처치하는 곳으로 아버지를 데려갔고 몇 가지 검사 후에 바로 수술실로 이동했다.


동의서를 받으러 온 주치의가 무거운 말투로 다짐받듯 나에게 말했다. 

의례적인 설명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기록을 보니까 지병도 있으시고 연세도 많으셔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분도 알고 계셔야 돼요

 











아버지의 수술은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됐던 것 같다.

다들 마음 한편에 무거운 근심과 걱정과,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품고 있는 대기실은 환하고 서늘했지만 또한 적막했다.

나는 몇 년 전 엄마가 암 수술받던 날을 기억해 냈다. 

그날도 나는 혼자였고 

혹시나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길까 수술실 벽의 네모 난 전광판을 수시로 노려보곤 했었다.




OOO님 수술 중입니다..
OOO님 회복 중입니다..
OOO님 대기 중입니다..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아버지의 말들을 정리해 보니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지 싶었다.


얼마 전부터 탈장 증세가 있었고 동네 병원 진료를 봤다.

의사는 상급병원에서 치료받기를 권했지만 우선 진통제 처방 정도만 받고 돌아왔다.

그 사이 증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으나 장남네 부부에게 아픈 기색을 하기 어려웠다.

왕래라고 해봐야 일 년에 한두 번쯤인 두 딸들에게 연락하기도 새삼스러웠다.

통증이 심해 다시 찾아 간 병원에서 빨리 상급 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매번 너한테 신세 지는 게 미안해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배우자와 자식들로부터 외면받은 늙은 아버지의 말로(末路)는 쓸쓸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간 지 한참 후에 첫째 누나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 괜찮지?
오늘 못 가서 미안하다




누나의 별일 아닌 것처럼, 어쩌면 태연스러운 말투에 나는 순간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를 본 이후로 신경은 날카롭게 예민해져 있었고 가까스로 눌러 놓았던 무언가가 뒷덜미를 쥐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은 사실, 

나머지 생물학적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쏟아내주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들 중에 하필이면 첫째 누나만 연락해 왔을 뿐이다.


대꾸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OO아, 아들은 원래 그런 거야





사실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늙은 부모를 케어해야 하는 데 필요한 갖가지 일들이 나와 내 아내에게 집중되고 있었고 다른 형제들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데 익숙해져 갔다.

범위를 병원과 관련된 것들로만 좁혀놓고 봐도, 암 수술 이후 3개월 6개월 단위로 각종 검사와 진료를 봐야 하는 엄마뿐 아니라 지병이 여럿인 아버지 역시 비슷한 간격으로 병원엘 오가야 하는 처지였는데 형제 중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그 일을 나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간 엄마 따로 아버지 따로, 평일에 휴가를 써가며 병원 문턱을 드나드는 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 되었지만 고령의 부모에게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오라는 말도 차마 입을 떼기 어려웠다.


적어도 그땐 그랬다.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화를 내서였을까.

다음날 오전 일찍 첫째 누나가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전달이 필요한 몇 가지 내용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그대로 그곳을 벗어났다.



스스로 제어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던 어린 시절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는 다들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었음에도 우리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좀처럼 서로 배려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노력과 인내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범주 안의 부모와 형제라는 관계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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