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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Sep 20. 2024

숲을 벗어나야 빛이 보인다

시작을 향한 끝



전조증상은 오래전부터 충분히 차고 넘쳤다.



임계점은 이미 한계치 가까이 도달한 지 오래다.

다만 어느 시점에 트리거가 당겨지느냐의 문제만

남아있었다.







삶은 때로 물음표의 연속. (pexels.com)












엄마는 임대아파트로 들어가기 전까지

1,2년 간격으로 총 세 군데의 원룸을 옮겨 살았다.

내가 장남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아마도 그중

세 번째 원룸으로의 이사를 준비할 무렵일 것이다.


두어달 쯤 전에 집에서 쓰던 공구함을 통째로 장남에게 빌려준 뒤로 아직 돌려받지 못해서 

이삿날 사용할만한 작은 드라이버 하나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 않았지만 장남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이사 사실을 알리고 공구함을 가져다주는 길에 

이사도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약간의 적막이 지나고 마지못해 입을 열듯이

장남이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거까지 해야 되냐




사실 그 통화가 있기 며칠 전

장남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내가 먼저 일어나 나가 버린 일이 있었다.


장남은 일종의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서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되던 혹은 주위에 누가 있던지 간에 자신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날도 시동생인 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형수에게 한참 동안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고 얼굴이 발개진 형수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주방 모퉁이에 얼음처럼 서 있기만 했었다.

논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져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소나기 같은 그 시간이 그치기만을 그대로 서서 기다렸을 거였다.

예전에도 그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고 모른 척 자리를 피하기도 했었으나 

그날따라 형수가 느낄 모멸감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그만 좀 해
아님 나 없는데서 그러던가





내 말에 장남의 미간이 일순간 쭈그러들었다.

잔뜩 독이 오른 목소리로 "건방지게 끼어든다"며 나를 향해 쏘아붙였는데 

그 소릴 듣고나자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집을 나왔다.


장남은 그 일을 앙금처럼 마음에 담아 뒀을 것이다.



아무튼 공구함을 돌려주려 나오지도, 엄마의 이사를 도울 생각도 없다는 장남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군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그와의 마지막 통화는 종료되었다.




그날부터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으며 앞으로도

우리 사이에 계획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유년시절을 포함해 나이 사십 대에 이르기까지

끈적한 망령처럼 떠돌며 나를 짓누르던 무게를

이제는 내려놓기로 했다.



그때가 아마도 2013년경 같다.










당시 장남은 변함없이 반백수와 다름없는 꼴을 하고 세월을 탕진해 가며 집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멀어졌고 어쩌다 보니 그의 가까이에는 동생인 나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기본적인 인성 문제가 가장 크겠으나 사업을 접은 이후로 갈수록 사회적인 고리나 타인과의 관계가 결여돼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남은 예전보다 부쩍 자주 나에게 연락해 왔다.

심심해서, 술이 마시고 싶어서, 빚 문제를 의논해야 할 때도, 그 밖에 사사로운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찾았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좀 그가 “사람 노릇”을 해줬으면 했다. 무기력의 고리를 끊고 집 밖으로 나가기를 바랐다. 허상을 좇는 대신 땀 흘려 노동해서 처자식을 벌어 먹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답답한 처지를 벗어나 일상적인 인간으로 변화하길 바라는 일말의 기대심을 가지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어떻게든 거들려고 했다.

웬만하면 그의 요구나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줬으며 그의 자존심을 헤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그렇게까지 장남 주변을 맴돌았던 이유 중에는 나날이 구김살이 늘어나는 조카들에 대한 측은함이 컸다.


장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놀랍도록 아버지를 빼다 박았는데 그로 인해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짓눌리고 갑갑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크고 많은 것을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 줄 사람이 한 명쯤은 더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맘때의 나는 가족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된 채로 너무나 외로웠었기 때문이다.







둘러보니 아무도 없더라     (pexels.com)












소식을 들은 엄마는 곤란해 보였다.

비록 같이 살던 집을 나와 따로 지내는 처지가 됐지만 장남을 향한 애틋함마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와 그 집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걱정스럽고 안쓰럽게 여기는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눈빛 가득 수심을 담아 말꼬리를 흐리곤 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장남과 그 집 식구들을 어떻게 챙겨 왔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기 때문에 예전처럼  섣불리 “니가 이해해” 라고 말하지 못했다.





복잡한 심사를 내비치는 엄마 앞에서

단호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더 이상 “형”과 연락할 일도 만날 일도 없을 것..

그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얘기라면
내 앞에서 일절 꺼내지 말 것.







그렇게 생물학적 “형”의 존재는 내 인생에서 증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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