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박의 추억
이제는 여느 연예인 못지않은 여행 유튜버 곽준빈은 자신의 성[姓]인 "곽"의 러시아어 표기를 그냥 영어 철자 읽듯이 장난스럽게 발음하며 "끄박[Квак]"이라 소개하곤 했다.
아울러 동명의 브랜드까지 론칭하여 특유의 친근하고 유쾌한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는데 사실은 해당 철자의 정확한 발음이 "끄왁", 빠르게 읽어서 "꽉"에 가깝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으나 러시아어에 문외한인 나로써는 뭐 크게 관심가는 논쟁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보면서 내게도 "끄박"이라 불리울만한 곽씨 성의 친구가 한명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되었다.
벌써 오래전, 여로모로 어리숙했던 내 삶의 많은 순간들을 함께 써 내려갔던 녀석이다.
그는 충청남도 서산시에서도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산골 마을로부터,
고2가 되던 해 봄, 서울로 전학 오면서 나와 만났다.
좁은 교실 안에 족히 육십여 명은 넘게 바글거리던 그 밀집된 공간에서 적당히 숫기없는 시골 전학생의 존재감은 당연히 미비했었지만 대학입시를 앞두었던 이듬해, 요즘의 스터디까페와 비슷한 동네의 도서실을 같이 다니게 된 계기로 부쩍 가까운 친구가 되어갔다.
당시 끄박의 행색은 차마 열아홉 고등학생이라 선뜻 소개하기 난처할 만큼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게 전반적으로 촌스러웠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단연코 압권은 마치 잭슨파이브 시절의 소년 마이클처럼 솜사탕 모양으로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철 수세미같이 질기기까지 한 곱슬머리였다.
듣자 하니 어려서부터 중장년의 어르신들이 주로 다니는 읍내의 이발소에서 대강대강 벌초하듯 웃자란 부분만 쳐내며 지냈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업소만 찾아다녔다는 녀석을 설득한 끝에 태어나 처음으로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섰던 날, 멋쩍은 듯 연신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잡은 끄박의 머릿결을 슬며시 만져보며 유심히 살피던 원장 아주머니가 입술을 오므리다 말고 덤덤히 말씀하셨다.
...학생. 이거 머리 위에 이고 다니면 무겁지 않았어?
기억을 되살려 보건대 끄박과 나는, 어쩌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버지를 닮아 주량이 쎈 편에 속했던 나와는 달리 녀석은 소주 반 병쯤 마시고 나면 나지막이 폼을 잡으며 내용을 종잡을 수 없는 흰소리들을 중얼거리곤 했는데 어느 새벽인가는 빨간 천막 안에 가려진 포장마차에서 고백하듯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이런 얘길 꺼내기도 했다.
... 나 사실은 서울에 와서 짜장면을 처음 먹어봤는데 말야,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 몰랐다.
평소 같으면 예의 그 술주정 쯤으로 여기고 망설임 없이 흘려들었을 그의 사연이 그날따라 마음에 남았다.
나는 녀석에게 짜장면뿐 아니라 탕수육, 혹은 군만두라도 곁들여서 사주고 싶어 졌고 그리하여 우리는 며칠 후 아르바이트를 함께 마치자마자 일당으로 받은 만 원짜리 몇 장씩을 지갑에 접어 넣은 채로 근처의 중국집부터 찾아 나섰다.
오늘만큼은 원없이 짜장면을 먹어 보리라.
끄박의 여드름 듬성듬성한 얼굴이 한껏 기대에 부풀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 보통으로 하나만 더 먹을까?
순식간에 간짜장 곱빼기 두 그릇을 말끔하게 비워낸 녀석이 다시 주문을 추가했을 때
빈 그릇을 치우러 온 직원의 시선이 갑자기 방향을 잃은 것처럼 빠르게 흔들거렸다.
그렇다. 유튜브 먹방이 활성화되리라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앉은 자리에서 연이어 세 그릇째 먹겠다고 나서는 인간이 그리 흔하진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훗날 두고두고 안줏거리로 남은 그날의 이벤트는 끄박이 중국집을 나온 지 채 오분도 되지 않아
가까운 아파트 담자락을 붙잡고 애써 먹었던 까만 간짜장을 모두 게워낸 것으로 막을 내렸다.
잠시 뒤 겨우 속을 진정시킨 녀석은 당구의 마지막 쿠션이 빗나갔을 때 보다 더 서글퍼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재수 끝에도 대학 진학에 실패한 그는 미련없이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치고 2년여 만에 민간인으로 돌아왔으나 한동안은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금은 뜬금없이 경찰공무원 준비를 시작한 거였는데 모두의 우려와 걱정을 비웃듯이 단번에 시험에 합격해 버렸다.
그때 녀석에게 처음으로 공무원직을 권했던 만년 7급 공시생 K형은 두고두고 "내가 끄박의 인생을 구제했노라"며 공치사를 남겼으나 정작 스스로를 구제했다는 소식은 끝내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갔다.
그 무렵 나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학생이거나 했을 때였으므로 불과 이십 대 중반에 직장인이 된 녀석은 때때로 어깨와 목에 가득 힘을 줘가며 대부분의 모임마다 술값을 책임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천에 자리잡고 말단 파출소에서부터 근무를 시작한 지 몇 년 후, 허허벌판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섰고 우리의 끄박은 그곳, 외사과로 발령받아 전출을 떠났다.
당시 친구들 몇이 모여 놀러 갔을 때 녀석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면서 모든 게 새 것으로 번들번들하던 공항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찾은 인천 공항에서 문득 떠오른 나의 "끄박"을 오랜만에 추억한다.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서로의 결혼식 사회를 번갈아 책임졌을 만큼 신뢰하는 절친이었으나
석연치 않은 오해와 나의 게으름으로 비롯되어 서먹해진 이후로 그만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벌써 십여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내 아이는 스무 살이 될만큼 자랐는데 녀석의 쌍둥이 딸들은 아마도 중학생쯤 되었을까.
하지만 어디에서건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만나지겠지.
기억 속의 끄박은 여전히 건재하다.
잠시 익숙한 것들을 멈춰두고 쉼표를 찍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