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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Jul 25. 2024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인간은 누구나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한 존재거든



넌 어려서부터
부모 말을 참 잘 따르는 아이였어







훗날, 고지능 AI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 역사상 유일한 승리의 족적을 남긴

위대한 바둑기사, 이세돌.


그의 이름을 딴 학원에서 열린

어린이 바둑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어.


공지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고 보니

복도를 오며가며 어깨를 잔뜩 오므리거나

마주오는 누군가를 피해

몸을 사선으로 비트는 일 정도는 당연할만큼

학원 내부가 복작복작했던 탓에

엄마랑 아빠는

네가 첫번째 대국을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는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대회가 끝날 때 쯤를 맞춰서 그곳으로 돌아왔던게지.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 그대로에서

너는 계속 바둑을 두고 있긴 했지만

한여름 푹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흘러나오는 눈물이며 콧물을

연신 닦아내기 바빴던거야.

조용한 대국장 안으로 너의 훌쩍이는 소리가

리듬을 타고 둥둥 떠다니도록 말야.


일단 다른 참가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궁금함을 꾹 참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떤 선생님 한분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조용히 일러주셨어.



    " 아이가 질 거 같으니까 속이 많이 상했나 봐요.

      아까부터 저렇게.. "



맞아. 그랬어.

너는 뭐든 지고 싶어 하지 않았지.

시시콜콜한 보드게임 마저도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평소 모습이

그제서야 퍼뜩 떠오르더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운전석 룸미러로 슬쩍 훔쳐본 너는

여전히 시무룩했어.

무언가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차로 정지신호에 차를 세우며 아빠는 그렇게 생각했지.


“아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설령 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속상해할 필요 없어. 다음에 더 잘하면 되거든.

… 그러니까 우리, 저녁에 삼겹살 먹을까?"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큰 규모의

지역대회 예선전에 참가하게 됐어.


장소는 어떤 학교의 체육관이었는데

1층 바닥에 줄지어 놓은 바둑판 사이로

촘촘히 이어 앉은 참가자들 모두

저마다 자신만의 숨겨 둔 “묘수”를 언제쯤 꺼내들까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 같았어.


그 틈에서 아빠는

2층 스탠드 중간 어디쯤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혹시 있을지 모를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자세로

휴지와 물티슈가 담긴 가방을 손에 쥔 채

대국 중인 너의 표정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펴야 했지.


하지만 너는 더이상

지난번처럼 쓰라린 패배를 예감하고 좌절하던

코 찔찔이가 아니었어.


이따금 골똘히 고민하는 듯도 보였지만

한 수 한 수 바둑돌을 척척 내려놓는 손놀림이

그날따라 아주 경쾌해 보였거든.

마치 흥에 겨워 사뿐히 실로폰을 두드리는 것처럼.


오호 이 녀석.. 오늘은 잘 풀리나 본데?




좋은 결과가 나오면

칭찬부터 듬뿍듬뿍 해줘야겠다 마음먹고

대회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린 끝에

참가자와 일행들 모두

1층 대국장에 모여 만나게 됐어.


예의 그 반짝이는 미소를 달고

내게로 뛰어오는 너를 안자마자

어깨에서 등까지 서너 번쯤 쓰다듬었을 거야.

그리곤 한쪽 벽면에 써붙인 경기결과를 함께 확인하러 갔지.





1승 2패. 예선탈락.




그나마 유일한 저 “1승” 도

한 지원자의 불참으로 인한

기권승이었던 걸로 기억해.


결국 너의 도전기는

아쉽게도 우리의 기대보다 조금 짧게 막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딱히 너를 위로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어.


왜냐면

눈치만 슬깃슬깃 살피던 나에게

네가 먼저 말을 걸어줬거든.


"아빠.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떨어져도 괜찮아.

열심히 했으면 됐지 뭐.

그리고 바둑은 이제 그만 배울래"




........

네가 아직 초딩이 되기 전,

웃을 때마다 동그랗게 휘어지는 눈썹과 눈매가

유난히 사랑스러웠던 시절,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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