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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Jul 31. 2024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하여

고등학교 3개년 요약본




1. 위기를 비껴가는 우리의 자세


모름지기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년에게

조금 긴 대화를 청하거나

무언가 제안을 하려고 한다면

사전에 꼼꼼하면서도 반복적인 자기 검열은 필수다.


자칫 별생각 없이 안일하게 말을 걸었다가는

찌그러진 미간 사이로 새어 나온 불만이

위아래 입술을 앙다물듯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짜증 섞인 단답형 대꾸만 영혼 없이 늘어놓다가

홀연히 본인 방 안으로 사라져 문을 걸어 잠근다면

그 후의 수습은 또 어찌할 것인가.


안 그래도 평균 이상인 내 혈압이

한순간에 급상승하는 불상사를 방지하면서

비눗방울처럼 오락가락 얇게 떠다니는

소년의 예민한 감성 위에

사소한 스크래치라도 남지 않도록

내용,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사용하려는 단어 선택에도 때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무료 이미지 - https://www.pexels.com





   이와 관련하여  80년대를 풍미했던  미녀가수,

   장혜리 님은 

   일찍이 아래와 같이 노래하셨더랬다.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마안 ~~
깨어지기 쉽다는 거 어 엇.





2. 고1


한 주의 마무리를 앞둔 어느 일요일 저녁.

여러 번 머릿속 회로를 돌린 끝에

몇 번이고 고쳐 쓴 대사를

이제야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막 식사를 마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구이가 만족스러웠던지

돌아보는 표정이 다행스럽게도 딱딱하지 않았다.



" 아들. 너도 이제 고딩이 됐으니까

집안일을 좀 분담해서 해 줬으면 좋겠어.

엄마랑도 얘기해 봤는데 말야

일단은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일을 같이 하면 어떨까 "

" 재활용?... 그래, 알았어 "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보니

이게 이렇게 주저할 일인가 하며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녀석의 대답은 짧고도 간명했다.  


방 안에 엄연히 휴지통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필요에 따라 손 닿는 곳으로 던지고 쌓아놓으면서

사계절 내내 아랑곳없이 지내는 녀석에게

뭔가를 정리하고 구분해서 버리는 일은

다소 생소한 임무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마찰이나 갈등 없이

순조롭게 협상이 종료된 거였다.


그리하여 그다음 주부터

우리 집 재활용 쓰레기의 정리 및 분리배출은

나를 제외한 두 모자()의 전담업무가 되었다.






3. 고2


다시 신학기가 시작되고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일정이 잡혔다.

특별한 이슈가 있는 건 아니라

서로들 바쁜 시간을 감안해서

학교 방문 대신 통화로 대체하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퇴근길 광역버스에 오르자마자

주머니 속에서 윙윙 진동음이 느껴졌다.


이어폰 같은 신문물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 나는

주변에 가득 떠다니는 소음에 섞여

행여나 선생님 말씀을 요만큼이라도 놓칠세라

두 손으로 감싸 쥔 핸드폰을

오른쪽 귀에 바짝 붙이고

그 옛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받아 적을 때처럼

온몸의 신경세포를 청력에 집중시켰다.



아이가 말입니다, 아버님..


다른 친구들이 꺼려하는 교실 내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것도 앞장서서 하구요,
여러 방면으로 아주 솔선수범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집 근처에 내릴 때까지 30여 분간 이어진

선생님과의 통화에서

아이의 성적부터 학교생활, 교우관계,

그 외 기타 등등..

이것저것 꽤 다양한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각인된 건

단연 “쓰레기 분리수거”였다.


아마도 집에서 몇 번 해봤던 익숙함이

그 자리로 이끌었겠지만

주변정리, 청소.. 뭐 이런 분야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 커왔던 녀석이

자그마치 학교에서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앞장서고 있었다니.


땀이 묻어 미끌해진 핸드폰 액정을 닦는데,

큭… 웃음이 나왔다.






4. 고3 1학기



본격적인 입시철을 앞두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go.kr)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생활기록부도 그중 하나인데


그 안에서 나의 아들은 여전히,

그리고 꾸준하게


분리수거 중이었다.




1학년 1학기때부터 이미 낌새가 보임


2학년 1학기


2학년 2학기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봉사활동 내역 중.


……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 엄마, 오늘 재활용 버리러 가는 날이지? ”

“ 어. 아빠가 아까 버리고 왔어 “

“ 오오.. 정말..? ”


순간 눈동자가 커지며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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