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지갑의 무게

임금체불을 겪은 사람의 조용한 기록

by 오유나

비 오는 어느 날이었다.
그날처럼 마음이 눅눅하게 젖은 날도 드물었다.


요즘 대표는 직원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팀원이 없는 시간에만 슬쩍 사무실에 들렀다 나갔다.
투자자나 외부 사람이 회사를 찾아와도, 우리조차 대표를 못 봤다고 말해야 했다.
실제로 우리도 못 봤으니깐..


그날,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 먹고 1층에서 보자."


뭔가 싶었지만, 나는 우산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대표도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걸어가면서 이야기하자”며 우산을 각자 쓴 채 백화점 방향으로 걸었다.


왜 백화점이지?


그는 말했다.
“이 힘든 시기에 남아줘서 고맙다. 그 고마움으로 뭘 하나 사주고 싶다.”


거절할 틈도 없이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비현실적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명품을 사준 적은 없었으니까.


우리는 1층부터 4층까지 돌아다녔다.
대표는 처음 보는 브랜드들도 소개해줬고, 원하는 걸 고르라고 했다.
며칠 전 지갑을 잃어버렸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지갑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샤넬백을 선물 받았다는 직원도 있다고 들었으니, 비교하면 나름 검소한 선택이었다.


이왕 월급도 못 받는 상황, 차라리 이런 거라도 받자는 마음이 들었다.
거절도, 받아들이기도 애매한 그 공기의 틈에서. 계산대에선 신용카드도, 체크카드도 아니었다.

백화점 카드였다.

그간 쌓인 포인트가 아주 많았다고 했다. 이전에도 보니 우리에게 밥을 사줄 때면 꼭 백화점에 가서 백화점 카드로 지불했다.
대표는 그 포인트로 계산을 마쳤다.
명품 특유의 번쩍이는 포장을 들고 우리는 다시 회사 1층으로 돌아왔다.


그 상자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사람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표는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나 역시, 굳이 말한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오늘의 나는 그 지갑을 버렸다.
그 안엔 고마움도, 선의도,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는 걸 이젠 안다.
그건 선물이 아니었다.
도구였다.

체불 상태에서 흔들리는 핵심 멤버 하나를, 그나마 붙잡기 위한 계산이었다.

민사와 형사 소송을 진행 중인 지금,
그 지갑을 들고 다니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고,
그때의 내가 그걸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그날, 차라리 면전에서 말할 걸 그랬다.
"이런 거 말고, 그 돈으로 밀린 급여나 식비를 달라"라고.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대표는 사기꾼으로서 영리했다.
모든 직원이 나를 믿고 따라오고 있었기에,
그 중간 고리를 붙잡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는 그저 “대표가 고맙다고 지갑을 사줬다”라고 말했다.
체불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가족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드디어 너도 인정받는 거구나."
"역시 우리 딸, 멋지다."


그 칭찬을 들으며,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무게는 지갑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가 삼킨 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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