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따라 ‘존재감’이라는 단어에 자꾸 마음이 걸린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를 증명하는 건 다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도 그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낯선 도시를 떠돌다 간신히 발을 붙였다고 했다.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하고, 햇볕에 빨래도 말리고. 말만 들어도 정착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하루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밤, 마음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고.
무언가를 이뤄낸 것도 아닌데, 축하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 도시에 왜 왔을까?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런 질문들이 멈추지 않는 밤이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결국, 한 가지 충동적인 결정을 했다.
낯선 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해버린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팀을 이뤄 짧은 시간 안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프로젝트.
입을 떼는 것도, 손을 드는 것도, 모르는 언어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 순간조차 불편했을 텐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친구는 처음엔 앞에 서서 주도하려 했다가 물러섰다고 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경쟁'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고.
결국 친구는 조금 더 조용한 자리, 누군가의 그림을 함께 완성해주는 역할을 택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처럼, 한 팀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사람, 아직 손에 익지 않은 기술들,
그리고 그 안에서 친구는 오히려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다고.
그 역할은 익숙한 자리였다.
빛을 조절하고, 구도를 잡고, 타인의 상상에 생기를 더해주는 일.
‘잘하고 싶다’보다는 ‘살아 있는 느낌’을 위해 움직였다고 했다.
결과보다 과정에 몸을 던지는, 그런 종류의 몰입.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날 밤이었다고 한다.
작업이 끝난 후, 모두가 피곤에 절어 테라스에 나란히 앉았다고 한다.
누군가 그 밤을 두고 ‘마치 영화 같지 않냐’고 말했는데,
친구는 그 순간마저도 어쩐지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봤다고 했다.
그 감정이 뭔지 알 것 같다.
좋았다고 말하는 게 낯간지럽고,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는 게 어쩐지 유치하게 느껴지는 마음.
그래서 방어적으로 굴게 된다.
"맞아"라고 대답은 하지만, 사실은 그 말에 전부 동의하지 못하는 마음.
나도 종종 그 자리에 있었다.
좋은 순간 앞에서 괜히 괄호를 치듯 물러나고,
감정에 책임지기 싫어 거리 두고,
오히려 조용히 관조하는 사람처럼 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방어했던 장면들이 오래 남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오래 생각했다.
내가 가장 최근에 무언가를 '설명 없이' 시도했던 건 언제였더라.
자기소개서에 쓰기 위한 활동도 아니고,
경력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해 했던 어떤 결정 말이다.
요즘은 그게 어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무언가를 해도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결국에는 그 계획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다시 실망한다.
그러니까 친구가 무언가를 망설임 없이 저지르고,
결과가 어땠든 어떤 장면을 통과해냈다는 그 사실이
이상할 만큼 나를 감동시켰다.
그 친구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결과보다는 살아 있는 감각을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요즘 나에게는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가시적인 성과"에만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
무언가를 할 땐 늘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는 숫자나 결과로 증명돼야 했고,
그래서 사람조차도 늘 자기 가치를 증명하듯 행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삶은 그런 방식으로만 살아지는 게 아니라고,
아주 단순한 장면 하나로도 충분히 '산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고,
친구의 이야기가 말해준 것 같다.
그 장면이 결국 나를 바꾸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때 그 친구는 분명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내 자리에서 조용히 되뇌고 있다.
그래도 괜찮았던 어떤 밤'이 있다는 것.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조금 덜 불안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