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실리콘밸리에 지사를 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비록 한국에 있지만, 나의 하루 대부분은 미국 팀과의 협업으로 채워진다. 두 나라가 각자 다른 방향에서 개발을 진행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중간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다. 누군가는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흐름을 다시 맞춰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자연스레 양쪽 모두와 깊게 엮이게 되었다. 한국 팀에서도, 미국 팀에서도 내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환대 속에서 ‘이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작은 확신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긍정적인 감정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느낀 건, 미국 쪽 팀의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이었다. 뭔가 느슨하고, 효율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은 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연봉을 받고 입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를 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도전적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의 연이은 해고 소식이 뉴스에 등장하면서, 불안감은 서서히 현실로 다가왔다. 처음엔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 일은 대기업, 그것도 다른 나라의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러다 얼마 전, 미국 팀의 엔지니어 한 명이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말이었다. 팀장이 급히 연락을 해와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며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줬다.
그 친구는 나와 약 반년 정도 함께 일한 동료였다. 두드러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3년 넘게 회사를 다닌 사람으로서 레거시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무엇보다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을 세심하게 도와줬던 사람이었다. 어느새 의지하게 되었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생각보다 크고 복잡한 공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게 더 큰 현실로 다가온 건, 그 공백을 이제 내가 메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혼자서 메인 엔지니어 역할을 수행한다는 건 부담스러웠고,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그가 해왔던 자잘한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이제야 더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선택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구조적인 판단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목을 줄이고, 결과물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변화가, 나의 역할을 더 분명히 드러내줄 기회일 수도 있었다.
오늘, 그 친구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한 달 뒤에 나가게 됐어. 소식 들었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와 내가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일주일 전에야 알았고, 미국에 가게 되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왜 이 회사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개인 메일을 주고받았고, 그는 “미국에 오면 꼭 연락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이제는 쉽지 않은 약속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정리해고라는 말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체감해 본 적이 없다. 작은 스타트업에서의 이직과 구조조정은 익숙했지만, 글로벌 대기업의 구성원으로서, 남겨진 사람으로 일하는 감정은 또 달랐다. 그 감정은 단순히 실무의 부담만은 아니었다.
회사라는 공간은 결국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한 명의 이탈은 표로 표시되는 숫자일 수 있지만, 내게는 함께 나눈 대화, 도와줬던 순간들, 영어로 웃으며 건넸던 농담 같은 것들로 기억된다. 그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과거형’이 되어버리는 건 언제나 낯설고 서운하다.
지금,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다.
그 사이를 잇는다는 건 단순히 업무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과 감정까지도 다리 놓는 일일지 모른다. 언어의 벽, 문화의 차이,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 속에서도,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글로벌 팀에서 징검다리로 살아간다는 것.
그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기억과 현실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