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한 선교사가 원주민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다. 원주민은 선교사에게 커다란 돌덩이를 주며 안고 가라는 몸짓을 하였다. 웬 돌덩이일까, 생각하다가 그 지역 말을 모르니 시키는 대로 하였다. 건너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강의 물살이 워낙 거세 물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돌덩이를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양쪽 강기슭에는 크고 작은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강을 건너는 사람의 체구에 맞게 적당한 돌을 골라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무거운 돌이면 가라앉거나 중심 잡기가 어려울 것이고, 너무 가벼운 돌은 물살에 휩쓸릴 것이다.
시시포스의 천형天刑처럼, 우리도 돌덩이를 안고 매일매일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다. 어쩌면 강의 물살보다 훨씬 더 거친 세파가 아닐까 싶다. 神이 아니고서야 걱정 없는 삶이 존재할까 싶다. 일찍이 석가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고, 그 고통은 8고八苦로 요약하여 말하였지만, 세상살이에서 크고 작은 걱정이야 인간의 호흡만큼이나 들락거리는 게 중생이다. 종교 문제, 금전 문제, 부부 문제, 부모 자식 간 문제, 직업 문제, 건강 문제, 친구 문제, 애정 문제……하다못해 아침에 눈 뜨면 오늘 입고 갈 옷부터 걱정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길은 납덩이 같은 근심 걱정을 내남없이 한 보퉁이씩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걱정이 백해무익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세상이 생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에 적당한 걱정이야말로 나를 목적지로 전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밝음을 선호한다고 그림자를 내치고 빛만 취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삶과 걱정은 빛과 그림자처럼 하나의 몸체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걱정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망각의 기술이 필요하다. 걱정이라는 것은 결국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질량이 존재한다. 어쩌면 생각의 무게는 물리적인 무게보다 더 무겁다. 근심 걱정에 밤새껏 뒤척이다가 아침에 출근 시에는 이미 중노동을 한 것과 같이 파김치가 되어버린 경우를 종종 보지 않던가. 우리가 걱정을 늘 안고 살아야만 하는 판에 살고 있지만,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마치 하나의 강을 건너기 위해 돌덩이를 안고 있었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돌덩이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삶에서 걱정을 인지하고 원하는 때에 내려놓기란 상당한 난제다. 걱정이란 놈은 양육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생기고 자라나지만, 걱정을 내려놓는 것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과 내려놓겠다는 의지의 영역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면을 바라보고 내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고 주시하여 돌덩이가 있는지 없는지 톺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 돌덩이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인생사에서 돌덩이를 안고 가는 길인데, 돌덩이를 안기보다는 내려놓기에 능숙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무게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다. 돌덩이가 너무 쌓여 무거워서 제풀에 주저앉은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또 돌덩이가 너무 가벼워 세상의 강에서 쓸려버릴까 봐 아예 건널 엄두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이 보아왔다.
나를 짓누르고 무겁게 하는 그 돌덩이를 언제든 들을 수 있는 기백이 필요하고,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어쩌면 각자의 인생에 주어지는 돌덩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 부여된 의미이고, 신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소명일 수도 있다. 그러니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사명으로 여길 때 강파른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건너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