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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디 Jan 17. 2022

그에게 끔찍하게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사랑해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상처받거나 거절당하는 것. 매 순간이 고통은 아니지만, 고통받지 않는 삶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보면 신기하게 힘든 일은 한 번에 생기지 않나요? 저는 감수성도 풍부하고 상상력도 좋은 편이라 여러 가지에 상처를 자주 받아요. 그래서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상처를 깊게 두지 않고, 힘든 일도 꾹 참고 견뎌보는 단단함이 생겼어요. 아직 말랑말랑한 단단함이라 미래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더 단단해져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가장 크게 받은 상처는 과거의 저한테 왔었어요. 프라하에서 살고 있었을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배낭 하나 메고 런던이나 파리로 왔다 갔다 하면 기분이 괜찮다가도, 가족 하나 없는 프라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있을 때는 미친 듯이 우울함이 찾아왔어요. 3~4일 정도를 방에서 울기만 한 날도 많았습니다. 그때 저를 찾아온 JAY나, 향이, 파리에 있었던 맹, 친언니가 아니었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어요.


그 시기 저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서 위로받았어요.




영화 프리다 (2003)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여성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그녀가 처음으로 가진 꿈은 의사였다고 해요. 대학교에서 생물학, 해부학 등을 배우는 의학 과정을 선택하죠. 이 시기 그녀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옵니다. 첫사랑과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차가 버스를 들이받는 사고가 난 거예요. 프리다는 이 사고로 버스 손잡이가 배를 관통하면서 자궁을 크게 다치고, 아이를 원했지만 불임이 됩니다. 쇄골, 골반이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져요. 다리 열한 곳이 골절됩니다.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 - 프리다 칼로 (1926)

모두 프리다가 죽을 거라고 했지만 프리다는 고통 속에서 눈을 떠요. 그녀는 거의 1 동안 척추고정용 코르셋을 착용한  병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함께 사고를 당한  남자 친구는 그녀를 찾지 않고 유학을 떠나요. 사랑했던 남자 친구도 그녀를 떠나고, 몸도 성치 않았던 그녀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시기 불편한 몸과 정신적 아픔, 그녀가 받은 상처가 담담한 얼굴  움직이는 파도에 묻혀있는  같아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그녀의 두 번째부터 마지막 시련까지는 한 남자를 만나고 시작됩니다. 멕시코 3대 거장 중 한 명인 디에고 리베라예요. 프리다 칼로는 원래 의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미술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디에고를 찾아가 다짜고짜 자신의 그림을 보여줬다고 해요. 디에고는 그녀의 그림을 극찬하고요. 둘은 서로의 작품을 보며 사랑에 빠집니다.


디에고와 프리다 칼로의 나이 차이는 스물한 살이었는데, 디에고는 유명인사였던 만큼 여자관계가 문란했어요.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존경하는 화가였지만 그의 엄청난 바람기로 고통받습니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불륜을 저질렀고, 모델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일종의 악수라고 말해요. 프리다는 그런 디에고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어요. 의사들은 교통사고로 다친 자궁 때문에 임신이 힘들 거라고 말렸지만 프라다는 임신에 성공합니다.


헨리 포드 병원 - 프리다 칼로 (1932)

<헨리 포드 병원>을 보면 극심한 출혈과 함께 핏덩이가 된 아이와 약해진 골반, 고통스럽게 꼬여버린 프리다가 있습니다. 임신 3개월 뒤 프리다는 극심한 출혈과 함께 아이를 유산해요. 당시 프리다는 디에고의 뉴욕 전시회를 위해 뉴욕에 있었어요. 그녀는 멕시코를 그리워했고 산업화가 진행된 뉴욕을 답답해합니다. 아이를 잃고 뉴욕의 헨리 포드 병원에서 몇 번이고 부서졌을 프리다가 직설적으로 다가와요. 얼마 뒤 프리다가 사랑하는 어머니도 돌아가십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총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고 해요.


단지 몇 번 찔렸을 뿐 - 프리다 칼로 (1935)

주변의 도움으로 상처를 극복해 나가고 있을 때,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녀를 보살피러 온 여동생과 남편인 디에고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거예요. 프리다는 그 길로 집을 나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을 고통스럽게 완성합니다. 강력하고 충격적인 그림이에요. 이 작품은 당시 가족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부인을 살인한 남자가 '저는 죽이려 한 게 아니라 단지 몇 번 찔렀을 뿐입니다.' 했다고 해요. 프리다는 이 그림에서 남자를 디에고와 비슷하게 그렸는데, 이 그림을 그리면서 분노를 조금씩 극복했다고 합니다. 이후 디에고와 이혼하지만 그녀는 디에고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사랑해요.


두 명이 프리다 - 프리다 칼로 (1939)

<두 명의 프리다>에서 그녀의 애증 섞인 마음이 잘 보여요. 귀족스러운 유럽풍 옷을 입은 프리다와, 멕시코 의상을 입은 두 명의 프리다의 심장이 연결되어있는데요 유럽 옷을 입은 프리다가 가위로 핏줄을 잘라버립니다. 잘린 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고요. 어느 정도 미술가로서 입지를 굳힌 왼쪽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잘라내고 싶지만, 오른쪽 프리다는 아직 그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피카소는 디에고에게 "나도, 당신도 프리다 칼로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했다고 해요.


파리에서 돌아온 프리다는 1년 뒤 디에고와 재혼합니다. 디에고가 프리다를 찾아오고, 프리다는 그를 너무 사랑했어요.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줬지만, 그럼에도 그를 사랑했던 프리다. 그녀의 선택은 고통을 꺼내어 몇 번이고 아프게 했던 날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무거운 감정에 솔직한 면모가 부럽기도 하고요.


부러진 척추 - 프리다 칼로

1944 그녀의 척추 통증이 재발합니다. 척추  개를 잇고 금속 막대로 고정시키는 대수술을 하게 돼요. 프리다는  작품을 그리던  다섯 달째 움직일  없었고,  개의 침대에 번갈아 누우며 그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저는 힘든 시기  작품을 자주 봤어요. 프리다의 눈과 몸에 박힌 못을 보면서 조금 울었던  같아요. 자그마한 못들에 피도 나지 않고, 표정도 변하지 않는 프리다도 사랑받고 싶은 소녀였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여자였겠죠. 지금 프리다의 이어진 눈썹이 강인한 여성의 상징처럼 굳혀진 이유는 그녀가 살면서 이겨낸 시련에 있다고 생각해요.


Viva La Vida - 프리다 칼로 (1954)




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
Viva La Vida

프리다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정물화인데요, Viva la vida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 에요. 저는 프라다가 남긴 말들을 참 좋아하는데요, 무릎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일기장에 적었던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두 발이 왜 필요하겠어.'라는 문장도 참 좋아해요. 앤서니 브라운도 이 말에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 있죠.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할 화가가 많지만, 20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화가를 꼽으라면 저는 단연 프리다를 꼽아요. 삶과 고통을 숨기지 않고 용감하게 드러내고, 수많은 고통을 그림으로 남겨놓은 프리다에게 저는 솔직해지는 방법과 스스로 상처를 깊게 파내지 않는 담담함을 배웠어요.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것부터,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까지. 제 인생에도 끔찍하게 큰 상처들이 오겠죠.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는 저는, 살면서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받게 될까요? 화가들의 사랑 얘기를 브런치에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100년 후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대단한 화가들도 끝없는 고통이 있었고 그것을 이겨내며 살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라요.


 글은 제가 좋아하는 정우철 도슨트 님의 책과 비슷하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살면서 고통스러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프리다 칼로의 말을 생각해보는 걸로요!  :)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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