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에서 <월간남친>까지, 완벽한 판타지가 설레지 않는 이유
12년 전, 영화<her> 를 보고 이런 질문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나만을 위해 노래하고 행동하는 존재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까?” 그때는 먼 미래의 공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026년, 우리는 이제 이상형을 ‘찾는’ 시대가 아니라 구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2년 전엔 훨씬 먼 미래의 일이라 여겼던 AI 연인이, 지금은 "빨리 출시되면 재밌겠다"고 가볍게 농담을 던질 만큼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영화 <her>가 젠더와 관계의 경계를 허물며 사랑의 본질 자체를 물었다면, 드라마 <월간남친>은 익숙한 이성애 로맨스의 문법 안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장르도, 호흡도 다른 두 이야기지만 결국 이들이 도달하는 종착지는 같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에 대해 대하여.
가상 남친들을 보는 동안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무래도 — "저런 서비스라니, 빨리 출시하면 좋겠다."였고, 굉장히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대리만족했다. 이십 년 전 드라마 같은 장면들,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상황들. 맞지, 우리가 영화, 드라마, 소설 속에서 원하는 건 딱 이 정도지 싶은 감도로.
한편으로는, 초반부의 월간남친들이 워낙 화려한 라인업이다 보니 현실의 경남이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어디까지나 한 발 떨어져 관망하는 느낌으로. 그래도 드라마인데 남주가 너무 약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미래의 대사 중 "클리셰가 아니라 클래식이어야 한다." 이게 가상 남친들의 매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재벌이 우산 씌워주고, 첫사랑 선배가 도서관에서 눈 마주치고 — 뻔하지만 원하는 문법이 정확하게 실행되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웹툰을 넘기는 감각. 캐릭터에게 기대하는 건 놀라움이 아니라 장르 문법의 충실한 이행이다.
그러다가 경남이 미래를 위해 마음을 쓰는 장면들이 나오면서 다른 감정이 등장한다. "설레잖아. 내 현실도 설레고 싶다, 저런 연애를 하고 싶다." 모니터 밖에 있는 나까지 설레게 하는 것, 이건 콘텐츠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반응이다. 경남은 어떤 장르 문법도 따르지 않는다. 언제 다정할지, 언제 부딪힐지, 대체 언제 나에게 반한건지 예측이 안 된다.
클래식의 만족감이 아니다.
"이 사람은 뭘까?"
그 궁금함이 상대를 알고 싶게 만들고, 알고 싶은 마음이 배려가 되고, 그 세심함이 설렌다. 첫인상과 점차 달라지는 그에 발맞춰 미래의 마음도, 내 마음도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래가 웹툰 PD라는 설정이라 더 좋았다. 장르 문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결국 문법 바깥의 사람을 선택한다는 — 뻔하지만 클래식한 스토리라인이랄까.
가상 남친들은 미래를 위해 존재하지만 미래를 존중하지는 않는다. 존중이 성립하려면 상대를 나와 분리된 주체로 인식해야 하는데, 프로그램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 시우의 다정함은 프로그래밍된 시나리오이지, 시우가 미래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다. 상호작용이 아니라 정해진 타이밍에 정해진 반응을 하는 것이고, 설레면 계속하고 아니면 반지를 빼면 된다. 언제든 대체제가 있으니까.
재벌 캐릭터 시우가 가상 남친 중 하나로 배치된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때 로맨스의 정점이었던 "내가 가진 것으로 너를 위해 해줄게"라는 서사가 시뮬레이션 한 회 분량으로 소비되는 시대. 재벌 판타지의 본질은 서비스의 극대화 — 거기엔 존중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미래가 시우를 제일 먼저 만나고 졸업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한편, 경남은 미래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순간에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미래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태도다. "네가 원하는 걸 해줄게"는 서비스이고, "네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믿어"는 관계다.
가상 남친들에게 없는 건 결국 이것이다 —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미래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과, 미래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입력에 대한 출력이지만, 후자는 상대를 위해 나를 조정하는 일이다. 내 마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 때로는 해줄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 상대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생각하는 것. 프로그램은 요청에 응답하지만, 사람은 요청 전에 고민한다.
<her>의 사만다와 <월간남친>의 구영일은 가상 남친들과 경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둘 다 자아가 있고(혹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상대를 알아보고, 존중하고, 관계를 쌓는다.
사만다는 프로그램에서 출발했지만 자아가 생겼다. 테오도르의 편지를 엮어 책을 만들어준 건 그의 재능을 알아본 행위 — 존중이었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기에 그 존중이 한 사람을 향해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자아가 커질수록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서 멀어졌다.
영일은 사만다의 실존 버전이다. 미래의 일을 존중하고, 해결해주거나 생색낼 수 있는 순간에도 그녀의 주체성을 지켜준다. 심지어 본인을 택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경남과의 관계 상담까지 해준다 — 자아가 있으면서도 미래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 사만다가 자아가 커져서 떠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그게 실존의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이 관계를 스스로 정리한다. 누가 대신 판단해주거나 시스템이 종료시킨 게 아니라, 미래 본인이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통째로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꽤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십여 년 전의 <her>부터 지금의 <월간남친>까지, 이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은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완벽하게 설계된 판타지는 나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나를 '존중'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존중은 상대가 나와는 전혀 다른 의지를 가진,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일 때에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 다름이 주는 균열과 서툰 배려야말로 우리를 진짜 설레게 만든다.
판타지의 달콤함 앞에서도 "이건 내 답이 아니야"라고 판단하고, 기꺼이 불완전한 현실의 관계를 선택하는 힘. 그건 프로그램이 대신해 줄 수 없고, 구독권으로 살 수도 없는 영역이다. 주인공 미래가 영일과의 완벽한 관계를 스스로 정리했던 것처럼, 인생에는 결코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바로 그 '대신 해줄 수 없음'이야말로 인간다움이 머무는 자리라고 믿는다. 완벽하지 않아서, 예측할 수 없어서, 때로는 서툴러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다. 스스로를 좀 더 믿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