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매년 설과 추석에만 가족여행을 간다.
이건 다 아빠 때문인데,
우리 아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가게 문을 닫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아픈 날에도 일단 가게 문을 열고
가게에서 앓는 편을 택하곤 한다.
그러니 이런 아빠를 설득해 휴일이 아닌 때에 여행을 갈 바에는
설과 추석에 비싼 비행기값과 숙소값을 내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우리 집은 매년 명절마다 가족여행을 다녀왔지만
올해 설에는 내가 고향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나도 오빠도 여행 계획을 짤 여유가 없어서 처음으로 온 가족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들과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경험은
처음엔 새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다.
내내 함께 붙어있는 것도 참 못할 짓이네~라는 생각이 들 무렵에 연휴가 끝났고
올해 추석엔 절대로 집에 남아있지 말자는
온 가족의 암묵적인 합의가 생겼다.
지금 나에겐 '올해 추석엔 어딜 가지?'라는 숙제가 부여되었다.
숙제를 끝내기 위해 먼저 부모님의 여권을 확인했다.
내가 작년에 여권을 갱신했으니 부모님 여권도 분명 갱신기간이 다가왔을 터였다.
안방 화장대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둔 부모님의 여권을 보니
역시나 두 분 모두 올해 9월이 여권 만료일이었다.
추석에 어딘가로 떠날 예정이라면 미리 갱신해 둬야겠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누군가 내 생각을 엿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시의적절하게
올해 3월부터 여권 신청 비용이 인상된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2천 원 인상된다고 한다.) 그래도 기왕 할 일이면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 싶어
여권 갱신을 위한 준비물을 알아보았다.
정부 24 사이트에 들어가 여권 갱신을 검색하니
여권사진, 기존 여권, 여권 갱신 신청서 등이 필요하다는 내용 외에
하단에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잠시라도 가게를 비우는 걸 부담스러워하시는 아빠를 잘 알기에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다면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온라인 신청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겐 생각지 못한 고난이 닥쳐온 것이다.
"아빠 온라인으로 신청 가능하다는데 이거 해볼까?"
"가게 안 비울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지. 해보자."
해보자는 말은 아빠가 했는데 결국 신청을 해야 하는 건 다 내 일이었다.
"아빠 온라인으로 신원인증을 해야 한다는데? 아빠 카카오톡 인증 있어?"
"그게 뭔데?"
"그럼 아빠 은행어플은? 아빠 계좌로 1원 보내서 인증번호 확인한대."
"아빤 핸드폰으로 은행어플 안 써. 그거 다 털린대."
"아니 그럼 아빠 그동안 은행 다 직접 갔어?"
"직접 가거나 아니면 가게 컴퓨터에 공인인증서 있는 걸로 했지?"
이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저녁 8시경 우리 집 거실이었고,
우리 집에는 내 노트북 외에 컴퓨터가 아예 없다.
그러니까 AI가 나타나서 인간의 일자리를 앗아간다고 우려하는 시대에
우리 부모님은 온라인에서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그리고 그 사실을 내가 이번에 알았다는 게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충격이었다.
결국 이 날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대신 다음날 아빠 가게로 내가 찾아가 가게 컴퓨터로 인증을 하기로 했다.
그나마 공인인증서가 있는 아빠는 양반이었다.
아빠 가게로 가 본인인증을 마친 뒤, 여권 갱신 신청을 마쳤다.
오후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와 이번엔 엄마의 여권 갱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예 온라인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막막함이 앞섰다.
"엄마 이메일 주소 알아?"
"옛날에 문화센터에서 만든 거 있는데 기억 안 나."
"그럼 엄마 지금 앱스토어 로그인한 구글 계정은 뭔지 알아?"
"그거 너네 오빠가 해준 거라 엄만 몰라."
엄마한테 물어본 것을 또 오빠에게 물어보고
오빠에게 물어본 것을 다시 엄마에게 물어보길 30분 넘게 지속했다.
짜증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누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삶이 너무 없어지는 거 아냐?"
나이 드는 부모님 곁에서 두 분을 잘 보살피며 살아보겠다 결심했던 순간엔
까짓 거 내 삶이 좀 줄어들어도 어떻겠나 생각했는데
현실이 되어 눈앞에 마주하니 내 결심은 별 것 아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엄마 이거 봐봐. 이게 엄마 계정이고, 이제 앞으로 이걸로 엄마 로그인 하면 돼."
"이게 AI야?"
"아니 엄마. 이건 그냥 엄마 아이디랑 비밀번호야. 아직 AI 쓴 거 하나도 없어. 20년 전에도 있던 거야."
"그럼 이걸로 뭐 해?"
"이제 엄마 이걸 누르면 로그인이 되고, 그걸로 엄마가 엄마라는 걸 인증하면 되는 거야. 요즘은 인터넷에서 사기를 많이 쳐서 본인인증 하는 절차가 되게 까다로워."
엄마에게 하나씩 하나씩 뭐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알려주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 하나씩 알려준다고 엄마가 금방 사용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설프게 이런 걸 알려줘서 스미싱이나 피싱에 당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물고기를 잡아다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게 맞다지만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새로운 고민이 떠올랐다.
내가 계속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하나하나 다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혹시라도 내가 없으면? 아니 나도 모르는 것이 새롭게 나오면?
그리고 먼 훗날 내가 부모님 나이가 되면?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의 여권 갱신에서 시작된 고민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이렇게라도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새로운 걸 단번에 익히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부모님과 함께 늙어가는 법’을 이제야 배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 알려주는 게 맞는지, 어디서부터는 그냥 대신해주는 게 맞는지 정답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같이 해결해 가는 것, 그 정도면 당장은 충분하지 않을까?
올해 추석 여행지도 결국 그렇게 정해질 것이다.
완벽하진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