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0 내 말을 들어주오

이상한 것만 물어보지 말고

by Anavrin

부모님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6화 참고)

지금의 나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어부가 아니라 원양어선의 어부다.

그것도 아주 촘촘한 그물을 쳐서 치어까지 싹 다 잡아버리는 아주 무자비한 어부.


부모님도 마음 놓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나)이 집에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더 자주 나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곤 한다.

지난 주말, 함께 예능을 보던 엄마가 갑자기 물었다.

"지석진이 몇 살인데 저 사람이 형, 형 거려?"

"나도 모르지?"

잠시의 정적이 지나고 엄마는 여전히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표정의 의미는 얼른 검색해서 알려달라는 뜻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포털사이트에 지석진을 검색한다.

요즘 연예인들은 왜 생년월일을 프로필에 안 써두는지 모르겠다.

꾸역꾸역 여러 블로그와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나무위키에서 겨우

지석진 씨의 생년월일을 찾아냈다.

"어 지석진 아저씨 환갑이네."

"어후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연예인은 연예인인가 봐."




화요일 오후,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니 집 앞에 택배상자가 네 개나 쌓여있었다.

'뭐지? 난 뭐 산 게 없는데? 오빠가 보냈나?'

택배상자에 붙은 송장을 보니 상품명엔 생전 처음 보는 제품이 적혀 있고,

수신인에 엄마 이름이 적혀 있다.

이걸 확인하자마자 순간 혈압이 올랐다.

저혈압인 나는 엄마 덕분에 이렇게라도 한 번씩 정상 혈압을 갖게 된다.

이게 바로 럭키비키라는 걸까?

이렇게라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택배박스를 들고 낑낑대며 현관문을 열고 엄마를 찾는다.

"엄마! 이거 다 엄마가 산 거야? 이거 뭔데!"

"아니 그게 소화에 좋다는 거야. 지방분해에도 좋대. 먹어보고 아니면 반품도 된대."

이번에 우리 엄마가 구매한 건 카무트 효소와 파비플로라였다.

"아! 엄마 이런 거 함부로 사 먹지 말라고!!!!!!"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이마를 짚은 채 고갤 숙인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우리 부모님은 온라인 쇼핑을 전혀 못 하시는 분들이다.

엄마가 가끔씩 이런 사고를 치는 건 홈쇼핑 때문이다.

홈쇼핑에 나와서 이런 걸 파는 쇼호스트들이 밉다.

애초에 이런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들도 문제고,

중년 연예인 몇 명과 의사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획기적인 발견인 양

건강식품을 열심히 홍보하는 프로그램들도 문제다.

식탁에 엄마를 앉혀두고 일장연설을 시작한다.


"엄마 내 말 좀 들어봐. 이미 엄마가 먹는 영양제로 영양은 충분하다니까. 그리고 자꾸 홈쇼핑에서 수상한 성분으로 된 거 먹다가 오히려 간에 부담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가끔 먹을게 가끔."

"가끔 먹어서 될 것 같으면 그게 영양제야? 그 정도면 치료제야."

"아 그만 좀 해 알겠어."

"엄마 사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야. 적어도 그게 뭔지, 어디에 좋은지 나한테 좀 물어보고 결정하면 안 돼?"


이성적인 내 말은 엄마의 귀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엄마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서 알겠어 알겠어만 연신 반복하다 이내 화장실로 도망쳐 버린다.

나의 성화(라고 쓰고 지랄이라 읽는다.)에 결국 엄마는 그날 구매한 것을 전부 반품시켰다.

속이 너무 상했다.

지석진 아저씨 생년월일 물어볼 때의 반의 반의 집중력만 여기에 쏟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래 나도 안다. 모든 인간은 나이 들수록 건강에 집착하게 된다는 걸.

나부터도 생일에 들어오는 선물이 죄다 홍삼, 비타민, 오메가 등이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도 술을 마시러 가지 않고,

밤을 새우는 건 생명이 깎이는 느낌이 든다.

환갑이 넘은 엄마가 영양제를 사는 걸 막고 싶은 게 아닌데

먹을 거면 제대로 된 걸 먹이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아니면 플라시보 효과라도 보게 가만히 두는 게 맞는 건가.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였다.




다음날,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는 글을 우연히 읽었다.

내가 부모님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알맞은 말을 찾지 못해

한참 고민하던 참이라 그 글을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마치 꿈속에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느꼈던 모호한 감정이 명확한 말로 정리되기 시작하자

복잡했던 머릿속도 금방 맑아졌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지켜나갈 나만의 원칙을 하나 정했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잘 살아가고 계셨으니

그분들의 결정이 건강이나 재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면 한 번만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부모님과 내가 다른 존재라는 걸 의식적으로 계속 되뇌기로 했다.

이런 내가 냉정한가 생각했지만,

내 모든 결정에 부모님이 사사건건 간섭하면 나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부모님의 모든 결정엔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과 함께 지낸 지 3개월 차, 정말로 함께 지내는 방법을 착실히 익혀가는 중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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