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
비가 쉼 없이 내렸다.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도망쳐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 소리쳤는지도 모를 그 외침에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파도처럼 일어나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가 맞는 방향인지도 모른 채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달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미 차에 타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누가 운전하고 있는지 보려고 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불명확한 발음의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이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분들은 탈출에 실패하신 겁니다."
그 말이 무슨 소리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차 안으로 빗물이 밀려 들어왔다.
온몸을 써 유리창을 깨 보려 했지만 허사였고
빗물은 계속 차 올랐다. 차가 빗물 속에 잠겼다.
'나 죽는 거야? 이렇게 어이없이?'
그리곤 전자기기 전원이 뽑히듯 툭 암전.
이건 내가 지난주 토요일에 꾼 꿈이다.
이런저런 황당한 꿈을 자주 꿔 봤지만
내가 죽는다는 걸 인식하는 꿈을 꾼 건 처음이라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죽음의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어이없음'이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사람이 죽는다고? 그것도 내가?
원래 사람은 당연히 죽는다는 사실을 토요일에 꾼 꿈이 상기시켰다.
꿈을 꾸고 나면 괜히 그 내용이나 대상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별로 관심도 없던 연예인이 꿈에 나오면 괜히 신경이 쓰이고,
원래 친하지 않던 사람이 꿈에 나오면 연락이나 해볼까 싶고.
이번 주 내 머릿속을 채운 건 '죽음'이었다.
꽃피는 춘삼월에 왜 죽음이라는 칙칙한 주제를 파고들고 있나 싶지만
토요일에 꾼 꿈이 너무 실감 났고,
일요일에 도서관에 가 빌린 책이 조앤 디디온의 상실이었고,
화요일에 읽은 박완서 작가의 수필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관한 글이었던 탓이다.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더 눈이 많이 가는 걸까?
아니면 그것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걸까?
그 두 가지의 순간이 맞닿는 순간 머릿속이 꽉 차버려 다른 생각을 못 하게 되어버린다.
조앤 디디온의 상실도 원래는 빌리려고 한 책이 아니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내가 빌리려고 했던 책을 먼저 찾고,
그다음 반납한 책 코너로 가 마음에 드는 책을 또 하나 고르곤 한다.
남들은 어떤 책을 읽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이미 누군가가 읽은 책이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데
상실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그렇게 유명한 책인 줄 몰랐다.
작가인 화자가 마찬가지로 작가였던 자신의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난 뒤
1년가량의 시간을 보내면서 적은 회고록인데,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모두들 그 사건이 벌어진 날이
얼마나 '평범한'날이었는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는 문장을 읽자마자
내가 꿈속에서 느낀 죽어가는 감각이 확 되살아났다.
맞아. 죽는 건 정말 갑자기 그리고 확실하게 벌어지는 일이고,
그건 정말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에 갑자기 끼어든 옆 차선 자동차 같은 존재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이가 들면서 시시각각 바뀌는데
10대에는 죽음이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는 것 따위 두렵지 않다고,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늙어갈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괜히 중2병이 무섭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20대에는 10대때보다 더 현실감 있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놓친 기회에 대해, 잘못된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될 때마다 한 걸음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살아간다는 게 매일 고통을 새롭게 갱신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더 깊은 고통을 알고 싶지 않아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30대인 지금은 내 죽음보다 주변 사람의 죽음이 두렵다.
고통은 삶을 이루는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더 이상 그것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있어 빛이 더 밝게 빛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거기에 요즘은 귀찮음까지 더해져 때가 되면 자연히 죽게 될 텐데
굳이 먼저 나서서 죽을 필요가 있나?싶기도 하다.
이렇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주변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별다른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 말은 곧 내가 우리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목격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인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하지만 그 현실이 조금씩 다가오는 걸 느낀다.
부모님이 얼마나 자주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하는지,
나도 부모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는지 헤아릴 수 없다.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꿈속의 내 몸이 그랬듯이.
지난주에 엄마가 산 건강식품을 보고 화가 났던 건
그런 것에 의존하기 시작한 엄마의 몸과 마음을 보는 게 화가 났던 거였다.
지친 사람을 꼬여내는 건 아주 쉽다.
엄마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더 화가 났다.
뭐가 늙었다고 그래. 왜 자꾸 힘들다고 그래. 나랑 더 오래 같이 살아야지.
그런 내 외침이 무색하게 부모님은 하루하루 흰머리가, 눈가의 주름이 늘어간다.
그리고 언젠가 나를 두고 두 분은 먼저 떠나게 되겠지.
이 상상은 원초적인 불안감을 건드린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았을 때의 공포.
원래 모든 인간은 고독한 것이라고,
혼자 와서 혼자 돌아가는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이 세상에 온 것과
함께라는 걸 알아버린 채 혼자 이 세상에 남겨지는 건
완전히 다른 혼자라는 걸 알아서 두렵다.
이런 마음을 먹었으면 지금을 감사히 여기며 좋은 얘기만 해야 하는데
못난 딸은 오늘도 못난 소리 몇 마디를 던지고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