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그것도 무려 죽음의 문턱에서 끝까지 버티고 살아 돌아와 준 작가의 신간을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감사하고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마지막 장에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듣지 못했던 말을 모두 털어냈다. 나는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가제본 274쪽)라는 문장이 가볍게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살고 싶다는 농담>을 다 읽고나서는 그가 발표했던 전작들과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어떤 일관된 흐름 속에 새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이 다시 돌아와 준 작가에 대한 팬으로서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그가 버텨온 과거와 함께 현재진행형으로 버티고 있는 삶의 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 버텨내야만 할 무언가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여러분 우리, 함께 버팁시다!’라는 그의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나만 버텨온 게 아니고, 나만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큰 위로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어떤 지적인 작가의 인정과 격려에 호응했던 것 같다. <나의 친애하는 적>에서는 ‘버팀’을 고단하게 만들거나 때로 분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계속 버틸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을 독자들과 공유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친애하는 적’뿐만 아니라 모두를 뒤로 한 채 갑작스러운 투병 기간 동안 ‘가장 극단적인’이라는 말로는 감히 표현이 안 될 정도의 고통을 견뎌냈고, 이제는 그냥 ‘버팁시다‘가 아니라 ‘우리 잘 살아냅시다’의 메시지로 다시 글을 썼다. ‘그 밤’이라고 표현한 생과 사의 무시무시한 기로에서 스스로 살아내기로 결심한 그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문제를 진정성 있게 다룬다. 사실 ‘자기 삶을 향한 주체적인 긍정’(199쪽)이라는 말은 그런 구절을 누가 어떤 맥락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매우 식상하거나 꼰대처럼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나도 견뎠으니 너도 견딜 수 있다, 또는 청춘의 아픔은 아름다운 것’과 같은 무례한 논리가 아니다. 그는 그가 젊은 시절(또는 최근까지)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젊은 사람들이 똑같이 겪지 않고도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글로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럼 다음 세대는 그와 다른 새로운 시행착오 속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 다시 그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철학적 상식이 얕은 사람이라도 그가 말하는 니체의 ‘영원회귀’나 ‘아모르파티’, ‘위버멘쉬’와 같은 단어를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스타워즈>나 괴물 영화를 기피하는 누군가라도 그가 그런 영화를 통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들여다보도록 이끄는 것은 바로 그 안에 담긴 그의 진심이다. 진정성 있는 에세이는 강한 힘이 있다. 여러 편의 글을 통해 만난 허지웅은 한 사람분의 ‘좋은 어른’으로 충실히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청년들이 ‘버거운 원칙이나 위악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기를(220쪽)’ 조언하면서, 때와 장소에 적절한 ‘가면‘도 쓰고 부조리함과 부패에 지혜롭게 맞서 버티되, 때로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용기 있게좋은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소수의 ‘내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들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새로운 상처를 자초하여 인생을 망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아프기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조금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견뎌낸 아픔은 그가 청년들에게 새롭게 던지려는 메시지를 더 단단하게, 더 묵직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라디오에서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어, ‘허지웅답기‘로 소통하는 그를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