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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May 15. 2021

장강명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

 이렇게 현실적이고 솔직한데 로맨틱한 게 분명한 신혼여행기 읽어보셨나요

  종종 몇몇 북토크에서 좋은 글쓰기에 대한 주제가 다루어지거나 에세이 쓰기 특강같은 게 있을 때 여러 작가들이 추천했던 책이다. 제목을 적어두기만 하고 잊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남의 신혼여행에 몰래 끼어 따라갔다 온 것 같은 랜선여행 비슷한 고품격 대리만족을 느꼈다. 이 코로나 시대에 그냥 여행도 아니고 남의 신혼여행을 들여다볼 기회라니. 충격적으로 솔직하고 디테일한 장강명 작가의 문장들 덕분에 재작년 겨울 다녀왔던 보라카이를 새롭게 경험했다.


  사실 결혼 전에 상상했던 신혼여행과 결혼 후에 알게 된 신혼여행의 본질은 완전히 달라서, 읽는 내내 결혼하고나서 읽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결혼 전에 읽었다면 아마도 무슨 신혼여행이 이렇게 현실적이고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건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신혼여행은 만인 앞에 부부임을 선언하기 이전에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상대방의 민낯(진짜 민낯도 포함..)을 확인하는 당황스러움의 과정이고, 도대체 그동안은 왜 몰랐는가 뼈저리게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래서 이 민낯으로 우리가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굉장히 빡센 워크샵이다. 이 워크샵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두 민낯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가에 따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의 관계는 한걸음 나아가기도 하고 간혹 찢어지기도 한다. 허니문은 결코 '허니'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혼인신고 5년 만에 떠나게 된 3박 5일 간의 보라카이 신혼여행의 준비과정에서부터 돌아온 후 21개월 뒤의 이야기까지 담긴 책이다. 여행 그 자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꽤 묵직한 주제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여정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결혼의 진정한 의미와 한국의 결혼 풍습,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주체적 삶, 좋은 삶과 행복의 조건, 삶의 의미라는 허구의 가치와 같은 주제들이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내 생각에 결혼의 핵심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선언에 있었다. 그 선언을 더 넓은 세상에 할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 굳건한 것이다. (187~188쪽)
이것이 허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사제의 삶이 왜 고귀한가? 하느님이 그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인가? 신을 믿지 않는 나는, 사제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제들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구속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사제 서품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사제복을 입고 자신이 선언자임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때문이다.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때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188쪽)

그러나 그런 주제들이 이 여행기를 따분하지 않게 만든 건 역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동거 과정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떠난 신혼여행이 아니라, 5년 만에 떠난 여행이라 이미 서로의 성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음에도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틀어짐이나 부부싸움 구경은 독자 입장에선 꽤 흥미진진하다. 서로 알지 못했던 모습을 확인하는 일, 이제껏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차이점들이 낯선 여행지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손을 잡는 과정이 보라카이의 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내에게 '이제 나 좋아?'라고 묻는 장강명 작가의 모습은 딱 이 책 안에서만 상상이 가능할 것 같다.) 온몸이 짐짝이 된 것처럼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벗어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화이트비치가 펼쳐지다가, 온갖 소음과 매연이 가득한 거리 뒤로 펼쳐지는 D몰은 흥겹고도 맛있다. 그러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니모와 함께하는 신세계가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곳.


p.s. 재작년에 나는 보라카이에서 폭풍우를 뚫고 패러 세일링을 하다가 인생 최악의 멀미가 나서 그 고운 화이트비치 해변가에 뻗어있느라 선셋 세일링을 놓쳤다. 장강명 작가가 극찬한 선셋 세일링 때문에라도 반드시 그곳에 다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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