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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un 18. 2021

대런 맥가비, 가난에 대한 체험적 통찰의 기록

하층 계급은 <가난 사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가난과 계급, 계급 정치와 빈곤 통치, 공공 부조와 관련된 문제들은 그 논의 방식의 적절성과는 별개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논의되어왔음에도 뚜렷한 해답을 정리하거나 성과를 판단하기 어려운 양상을 보인다. 다양한 정치적, 학술적 논의와 누구에게나 밝고 희망찬 미래를 담보할 것만 같은 공익 광고 포스터 속의 숱한 복지 정책들, 수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외침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근 계급 간 빈부 격차의 문제를 다룬 봉준호 감독의 블랙코미디 <기생충>이 보여준 영화적 성공은, 빈부격차 문제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빈자와 부자의 심리적 단절감뿐만 아니라 빈곤층 내부에서 또다시 세분화 되어 발생하는 계층 간 이질감까지 얽히고설켜 잔혹하게 다층화되어 가고 있음을 상기시킨 것에 기인한다.          



    84년생 대런 맥가비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남부의 폴록에서 하층계급으로서 학대와 폭력의 일상 속에서 극도의 긴장감이나 압박감을 술이나 마약과 같은 약물에 의존하며 성장한다. 불우한 가정사와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약물 의존적인 삶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곤 했다. 그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센터에서 고용한 상담교사 메릴린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마주하게 된다. 얼마 간의 상담을 통해 그 분노의 근원을 찾고 자신의 혼란스러운 정서에 객관적인 맥락을 발견함으로써 자기 통제 능력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 살 때 어머니가 죽고 나서 공공 주거 지원 계획에 추천받아 3년 동안 간신히 노숙자 처지를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주와 약물 중독을 쉽게 끊지 못한다. 그가 힙합을 접하고 래퍼 로키로 알려지면서부터는 교도소에서 소년범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폭력이 아닌 랩으로 표현하도록 안내하는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에 누적된 우울감과 치유되지 않은 분노는 늘 그를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로 몰아 넣었다. 급기야 수업 중간에 화장실에 가서 수감자들 몰래 약물을 복용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뉴스에서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자선단체와 예술단체를 비롯해 청소년 지도사나 정치인들에게도 유명한 청년이 되지만, 그에게 허락된 말하기가 단지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가혹한 가난 경험에 그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TV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들은 그가 알코올 중독자였던 엄마에게 학대받은 끔찍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만, 그가 가난을 둘러싼 구조에 대한 비판을 담아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려고 할 때는 어색해하며 귀를 닫았다. 그의 목소리는 단지 식견이 없고 정신질환을 앓는 불쌍한 빈곤층 청년의 건설적이지 않은 분노로 무시되거나, 노동계급에 목소리를 부여해주는 중간계급의 선의에 괘씸하게 저항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을 다루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하여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는 서문에서 2017년 6월 런던 서쪽의 고층 아파트 그렌펠타워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심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역 당국의 안일한 행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빈곤층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다양한 신문 기사, 뉴스 단신, 라디오 프로그램이 고층 아파트의 삶을 담으려 했다. 이런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오랫동안 무시되고 잊혀왔으나, 이제 갑자기 온갖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 뜻은 고귀했으나,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휘발되었다. 진열창 앞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둘러보는 사파리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그에 대해 서서히 잊어버리고 만다.”(12쪽)      


     그는 또한 언론이 아동학대와 청소년 범죄를 다루는 방식과 그에 대한 중간계급 시청자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파리를 발견한다. 아동학대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들―나약하고 상처로 얼룩진 가여운 아이들 또는 지저분한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옷가지와 같은 그들의 흔적―이 나열되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피해 아동에 대한 연민과 부모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경험한다. 그러다가 바로 다음 뉴스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청소년 범죄나 중독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 매우 불쾌하고 언짢은 목소리로 요즘 청소년들을 한심해하는가 하면 이번에도 그들의 부모를 탓하며 채널을 돌린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방치되고 학대받은 아이, 난폭한 청소년, 노숙인,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 그리고 끔찍하고 무책임하며 폭력적인 부모가 실은 삶의 다양한 단계에 있는 동일인물인데도 말이다.’(170쪽) 우리 사회에서도 ‘정인이 사건’을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아동학대 사건이 계속 반복되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단일 사건들의 내용만을 얼마나 자극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하는가에 따라 대중 분노의 불씨가 오래가기도 하고 금세 꺼져버리기도 한다.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와 신고를 받은 아동학대 조사원들의 책임만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정도의 대안은 그 실현가능성이 매우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뉴스 말미에 잠깐 언급되고 지나갈 뿐이다. 실현가능성이 애매하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뉴스도 지적하는 것 말고는 그 이상의 생산적인 논의를 확장시키지는 못한다.       


    대중 매체를 포함하여 각종 자선단체나 예술단체, 심지어 빈곤지역 주민들을 위해 진행하는 주민센터의 프로젝트도 중앙정부의 권력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들 모두 제국 열강과 비슷하게 빈곤 지역을 현대화시켜야 할 원시문화로 볼 뿐 지역 주민들의 열망이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빈곤산업의 주체가 산업의 주요 대상인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그들의 이야기 방식을 질책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빈곤 산업이 가진 애초의 목적은 모호해지고 만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이런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이들의 삶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조직이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채굴한 데이터와 서사를 담고 있는 자본 말이다. 선의를 가진 학생, 학자, 전문가들이 줄줄이 가난 깊숙이 내려와 필요한 걸 뽑아내고는 고립된 자신들의 집단으로 물러나 가난 사파리에서 가져온 인공 유물을 검토하는 것이다.”(148쪽)      


    가난은 하나로 뭉뚱그려서 해결하겠다고 덤빌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개인이 가진 가난 서사의 다양성과 원인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가난을 구제해보겠다는 시도는 속이 텅 빈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그는 기아와 아동 학대, 정서적 불안과 폭력의 일상화, 약물중독이나 성폭력과 같은 다양한 범죄를 가난과 연결지어, 하층계급의 삶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는 중독, 폭력, 만성질환뿐 아니라 공공 서비스의 다양한 위기 같은 사회 문제를 연결하는 결합조직’(298쪽)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제대로 된 기능을 상실해버린 가난한 가정에서 예측 불가능한 폭력으로 만성적 공포감에 시달렸던 자신의 어린시절과 약물에 의존하며 불안정한 정서 상태로 부유해온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가난 구제가 결코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난을 뿌리 뽑기까지 그것을 온전히 국가만 할 수 있는 일로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구제의 주체를 국가나 체제로만 돌릴 때 오히려 가난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빈곤층 개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는 이런 접근법이 ‘모든 사회악의 책임을 체제나 모호하게 규정한 권력의 역학관계로 돌리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299쪽~300쪽)라고 말한다.


    우파는 안전한 진열창 밖에서 사파리를 즐기며 진열창 안의 빈곤층에게 어쩌다 거기 갇혔냐고 나와보라고 조롱하거나 꺼내주겠다고 때때로 입 발린 말을 하며 사파리를 유지한다. 좌파는 다같이 힘을 모아 저 말도 안되는 진열창 자체를 깨 부숴야 하니 거기 동참하지 않는 빈곤 지역 주민은 배신자라고 몰아간다. 맥가비는 좌우파 모두에게 문제를 제기하며, 그런 정치적 논쟁에서 진열창에 갇힌 빈곤 계층 개인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진열창에 갇힌 빈곤 계층 개개인이 잘못된 피해의식을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 개인이 처한 상황과 행동의 동기 등을 스스로 검토하며 발전할 수 있어야, 형식적으로 가난 구제 프로젝트들을 남발하거나 빈곤층을 교묘하게 권력에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운 방향으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는 노동 계급이자 하층 계급으로서,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불안한 관계와 가난 속에서 보내왔으면서도 그의 인생 전체와 가난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으로 통찰한 기록이다. 동시에, 그는 그가 주장하고 있는 빈곤층 개인의 발전적 변화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번역이나 편집 상의 문제인지, 원문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좀 더디게 읽혀도 마지막장까지 꼭 읽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2018년 영국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적 글쓰기에 수여하는 오웰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덧) 읽기를 마치고 우연히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에서 관련된 책의 서평을 발견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21세기의 빈곤 통치는 어떤 또 다른 위협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하여 대런 맥가비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한 책들이다.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자동화된 불평등>과 제니퍼 M.실바의 <커밍 업 쇼트>, 로익 바탕의 <가난을 엄벌하다>가 좋은 상호텍스트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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